메뉴 건너뛰기

close

남구에 이천동(梨泉洞)이 있다. 천(泉)은 온천(溫泉, hot spring)의 '천'이니 샘이다. 이(梨)는 이화(梨花)여대의 '이'이기도 하고,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다정가(多情歌)"―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ㅣ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에 나오는 이화(梨花, 배꽃)의 '이'이기도 하니 '이(梨)'는 결국 과일의 한 가지인 배를 가리킨다. 즉, 현재 이천동의 위치인 수도산 아래에는 옛날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나무가 많고, 배밭에 맑은 샘이 있다고 해서 '배샘마실'(이천동)이라 마을이름을 붙였다.

 

달서구의 이곡동(梨谷洞)도 대략 그와 같다. 배[梨]나무가 많은 마을[谷]이니 우리말로는 '배실'(실= 마실)이었고, 한자어로 옮겨지면서 이곡이 되었다. 서구의 이현동(梨峴洞)은 옛날에는 마을 앞으로 강이 있어 배를 띄웠는데 마침 강변에 오래된 배[梨]나무가 있어 사람들은 그 나무에 배[船]를 묶어두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리동  사람들이 이 곳으로 오기 위해서는 고개[峴]를 넘어와야 했다. 그런 연유에서 사람들은 배[梨]와 고개[峴]를 합쳐 동명으로 삼았다. 상리동은 본디 배[梨]나무와는 상관이 없고 그저 상리(上里)였는데, 1965년에 상리동과 죽전동 사이에 위치하는 마을이라는 이유로 중리동(中里洞)이라 불리던 마을, 그리고 이현동과 합쳐져 상중리동(上中梨洞)이 되었다가 1985년에 다시 상리동(上梨洞), 중리동, 이현동으로 분리되면서 동명에 '里' 대신 '梨'가 들어가게 되었다. 

 

도원동은 그 이름만 듣고도 마을 일대의 경치가 '무릉도원'과도 같은 신선의 경지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의 뒤로 산까지 이어지는 골이 몹시도 그윽하고 경관이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은 그 마을에 '무릉도원'의 '도원'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등장한 이래 인간의 이상향(理想鄕)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무릉도원의 이름을 땄으니 실제로도 옛날의 도원동에서 복숭아[桃]가 많이 생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원동의 동명을 먹을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름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

 

동구의 율하동(栗下洞)은 사람들이 밤[栗] 아래[下]에서 산다고 할 정도로 마을에 밤나무가 많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자 '栗'의 의미만 알아도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는 동명 해석이다. 그렇다면 동구에 있는 갈산동(葛山洞)의 유래는 무엇일까. 갈(葛)은 '칡'이고, 산(山)은 '뫼'이니 본디 이 마을의 이름은 '칡뫼'였음이 분명하다. '칡뫼'가 한 글자만 우선 한자로 바뀌어 '갈(葛)뫼'가 되었다가 다시 갈산(葛山)으로 모두 한자화하였다. 마을 뒤에 산이 있었고 그 산에 칡이 많았기에 마을 이름이 칡뫼, 갈뫼, 갈산이라 정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산의 이름들이 한자화하는 것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것은 '남산=앞산'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마을은 배산임수를 따른다. 마을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다. 만약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들판 너머로 산이 있다면 그 산은 저절로 '앞산'이 되고, 한자어로는 남산(南山)이 된다. 우리나라의 집과 마을 들은 언제나 남쪽을 향하고 있으니 그 '앞산'은 한자어로 남산(南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南)쪽이 곧 '앞'쪽인 까닭이다.)

 

이제 달서구에 있는 감삼동(甘三洞)의 유래를 살펴보자. 감(甘)은 과일 감(홍시의 柿)의 뜻이 아니라 '달다'는 의미이다. 즉, 감삼동이라는 동명은 그 마을에 '단 것'이 세 가지 있다는 뜻이다. 그 '단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감[柿]'이다. 감[柿]은 곧 '甘[달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지 않고 떫고, 생감이자 땡감이면 그것은 형식으로야 감이되 내용상으로는 감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게다가 '달다'를 뜻하는 감(甘)이 우리말 발음으로는 '감'이 되니, 동명 '감삼(甘三)동'에는 단[甘] 감[柿]이 셋[三] 있다는 차원의 언어유희까지 숨어 있다.

 

감삼동에는 원래 감이 많이 났다. 300여 년 전 마을을 지나던 원님이 탐스럽게 달린 감들을 보고 감탄을 하자 마을에서는 맛보시라며 잘 익은 감을 드렸다. 원님은 감을 연거푸 세 개나 먹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하자 '감 셋을 먹은 동네'라는 뜻에서 '감삼'동이라 작명을 하여 주었는데, 원님은 그 때 시(柿)를 쓰지 않고(시삼동柿三洞이라 하지 않고) 甘을 사용하여 감(柿)의 의미와 '달다[甘]'의 뜻을 두루 동명 속에 내포해내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만한 원님이면 우리가 그를 '언어의 마술사'라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이는 서구 비산동(飛山洞)의 본디 이름이 '감나무마을'이었는데 뒷날 사람들이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시목촌(柿木村)으로 부른 것과 견줘보면 확연히 대조가 된다.)

 

물론 이제는 감삼동이라고 해서 감나무가 특별히 많이 자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달서구청이나 감삼동사무소에서는 동네 곳곳에 감나무를 심어 동명의 유래를 다시금 되살아나게 해보는 것도 좋을 터이다.

 


태그:#동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