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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침침한 무대는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쪽은 '모나리자 다방' 또 다른 한쪽은 선술집 '은성'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비좁은 계단을 내려가자 역시 작고 낮은 문, 그 낮은 문을 들어서다가 문틀에 박치기를 하고 얼떨떨하게 들어선 비좁은 공연장이 연극 실험실 '혜화동1번지'였다.

 

곧 침침하게 켜져 있던 불이 꺼지고 왁자지껄 떠드는 소음이 어둠을 뚫는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 배우와 꽃 파는 소년, 전도하러 나온 기독교인들까지 마구 떠들어대는 15~6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무대 중앙을 점령하며 소란하다가 출입구 쪽 객석에 앉아 있던 중절모를 쓴 중년의 신사가 명동을 소개하는 것으로 극이 시작된다.

 

객석에서 일어나 무대로 나선 중년의 중절모 신사가 바로 1960년대 명동일대를 풍미했던 명동백작 이봉구 선생이었다. 극의 진행은 모나리자 다방과 선술집 은성을 무대로 번갈아 이어졌다. 곧 모나리자 다방에 불이 켜지고 함께 다방으로 들어와 마주 앉은 이봉구와 전혜린, 그러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전혜린이 다방마담에게 음악이 이게 뭐냐며 벌어진 해프닝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1950년대 비극적인 전쟁의 화마가 할퀴고 간 가난하고 참담한 거리에서 시인 예술가들은 삶과 사랑과 자유에 대해 고뇌하며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가난하고 사상을 검증당하고 억압받는 사회에서 문학과 예술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화두였다.

 

한마당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이야기는 연극과 문학에 대한 담론, 그리고 사랑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아파하는 모습이 때로는 웃음을 자아냈지만 때로는 객석까지 무겁게 짓누르곤 했다, 특히 시인 박인환과 이봉구, 전혜린, 비련의 여배우 남궁연은 당시 어지럽고 복잡한 사회상의 일면을 이야기하며 고뇌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난한 삶을 애써 외면하고 순수문학과 예술에 몰두하는 이들의 참담한 현실은 꽃 파는 문학 소년을 통해 읊조리는 러시아가 낳은 시인 푸슈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통해 은연중에 작은 위로를 던져주기도 했다.

 

줄거리는 연극의 제목인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시인의 '세월이 가면'이 시로 쓰여 지고, 작곡가 이진섭과 성악가 임만섭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져 불리게 되는 과정, 그리고 1960년대 문학과 연극으로 대변되는 창작 공연예술의 메카 명동거리를 활보하며 무수한 전설을 남긴 문인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객석을 울린 장면은 문학에 대한 길이 서로 달랐던 박인환 시인과 조병화, 김광주시인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말다툼과 몸싸움, 그리고 박인환 시인이 조병화, 김광주 두 시인에게 매달리며 돈 3원만 빌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이 그냥 돌아간 후 함께 있던 이진섭에게 '집에 밥해 먹을 쌀이 떨어졌는데 돈을 구하지 못해 그냥 들어가야 하는 가장의 마음을 아느냐'고 절규하는 박인환의 울부짖음에 가슴 뭉클 솟아나오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다음날 아침, 거리에서 그는 술에 만취된 채 31세의 싸늘한 죽음으로 발견되었다'는 이봉구의 말에 객석 이곳저곳에서 훌쩍! 훌쩍!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극의 끝부분 장면은 순수예술시인의 대표격이었던 명동신사 박인환과 달리, 그 반대편에 섰던 김수영에 대한 오해와 불신의 골이 깊었던 이봉구가 명동에서 김수영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김수영은 여전히 박인환의 시를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팔자 좋게 미국 유학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고향에 내려가 칩거하고 있었는데 항상 명동이 그리웠다고 실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 '시인을 일컬어 천형(天刑)의 죄인'이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자신에게 하신 '그까짓 쓰잘데없는 시는 왜 쓰느냐?'고 하신 말씀은 자신에게 영원한 '화두'라고 하는 것이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출연 배우들이 모두 나와 인사하는 중에 명동백작 이봉구는 '시와 예술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속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경제나 물질 같은 것들은 그 필요 때문에 사람들을 속박하고 억압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연극 '세월이 가면'은 1950년~60년대 우리 예술사에 대한 문화연구와 함께, 권력과 힘으로 점철된 이 시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술의 본질과 시대적 상황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작품이었다.

 

국내 유일의 연출가 동인들의 모임인 혜화동 1번지 동인은 1994년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1, 상업적 연극에서 벗어나고. 2, 연극적 고장관념을 탈피하며, 3, 개성 강한 실험극을 무대에 올릴 것 등을 결의하며 탄생되었다.

 

이들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라는 극장공간을 통해 젊은 연출가로서 자신들의 확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다양한 연극계의 파장을 담아내겠다는 당찬 의지를 담고 출발한 것이다.

 

2009 혜화동1번지 4기 동인 페스티벌 '마피아 게임을 하다'는 2009년 4월 1일부터 6월 7일까지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세월이 가면' '오이디푸스' '슬픔 혹은' '하녀들'이 차례로 올려지는데. 이번 작품 '세월이 가면'은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오는 4월 26일까지 공연된다.


태그:#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박인환, #이승철, #이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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