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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 정상인 마천대에 올라서 산 아래 풍경을 조망한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험준한 준령들이 달려가고 산줄기 여기저기엔 기이한 바위들이 솟구쳐 있다. 왜 대둔산을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마천대에서 조망을 마치고 나서 서남쪽 능선을 타고 안심사로 향한다. 내려가는 길에 처음으로 마주친 길은 산죽 사이로 난 오솔길이다. 사각사각 옷깃을 스치는 산죽의 소리가 걷는 맛을 더해 준다. 한참을 가다 보니 이번에는 아찔한 암릉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긴장과 이완이 되풀이되는 산길을 걸어간다.

 

이 길은 인적이 드문 길이다. 이 산길을 내려가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허등봉 - 쌍바위를 거쳐 2시간 반가량 걸려 안심사에 도착한다. 안심사 경내로 들어서니, 시간이 벌써 오후 3시가 지났다.

 

 

안심사의 진정한 주인은 공터를 떠도는 바람

 

안심사는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안심골에 터잡고 있다. 서기 638년(신라 선덕여왕 7) 자장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자장이 기도하던 중에 부처가 나타나 '열반성지 안심입명 처(處)로 가라'라고 해서 이곳에 와 절을 짓고 안심사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려오는 산길 옆 다랑논들 가운데 서 있는 <안심사사적비>가 전하는 내용은 이와 조금 다르다. 

 

한문공 각하가 '뭐라 말하기 어렵다' 한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해 준비된 말이다. 원래의 비문을 살펴보면 절을 창건한 사람이 조구(祖球)이고, 글을 청한 사람은 처능(處能)이며, 이 사람이 명능(明能)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두 명의 능(能)이 있는 것이다. 조구는 곧 고려 태조 때의 고승이다. 옛 기록에는 절을 창건한 사람이 자장대사로 당나라 정관(태종의 연호) 연간의 일이며, 재차 창건한 사람은 도선대사로 역시 당나라 건부(乾符 : 희종의 연호) 연간의 일이며, 세 번째로 창건한 사람이 조구라고 하니, 과연 믿을 만한 기록인지 알 수 없다.

        - 안심사 사적비에서(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역)

 

안심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있었던 큰 절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고 말았다. 경내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넓은 빈 터가 많다. 이곳의 진정한 주인은 공터를 떠도는 바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휑당그레 하다.  

 

전각이라야 모두 4채뿐이다. 불전인 적광전을 중심으로 뒤쪽으로는 산신각이 있고 오른쪽에는 승방 겸 요사채, 왼쪽 계곡 옆에는 삼성각이 있다. 그리고 가건물인 적멸보궁이 있다. 이 모두 근래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먼저 주불전인 적광전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본다. 1991년에 세운 이 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의 아담한 불전이다. 적광(寂光)이란 마음의 번뇌가 끊어지고, 몸의 괴로움이 사라진 해탈·열반의 경지에서 발하는 참다운 지혜의 빛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단 중앙에는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비로자나불은 눈을 감은 채 지권인 수인을 결하고 있다. 곧추세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잡고 검지 끝에 오른손 검지를 포개듯이 올려놓은 손 모양이다. 일체의 무명과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다.

 

비로자나불의 좌우엔 보살입상과 지장보살입상을 모시고 있다. 불상 위에 걸린 닫집이 어찌나 커다란지 전체적으로 균형과 비례가 맞지 얺는 듯한 느낌이다 .

 

적광전 마당가에는 불에 타다 남은 석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전란이 남긴 상처가 여태 이렇게 남아 있는 걸 보면 전쟁의 참화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알 것 같다.

 

조형미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안심사계단

 

적광전을 뒤로 한 채 산 아래 계단(戒壇)으로 간다. 계단은 부처의 사리 봉안 및 계율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내가 여기까지 먼 걸음을 한 것은 이 계단을 보기 위함이었다. 안심사계단은 17세기 중반 이후 적어도 1759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759년에 세운 안심사사적비에 계단의 존재가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혜장대왕(영조))이 등극 후에 각(閣)을 건립하고 비문을 받들어 세운 지 오래되었다. 다만 농석(숫돌)이 갖추어져 있고, 또 절에 오래전부터 불가에서 존숭하는 치아와 사리가 각각 1개, 10습이 보물로 소장되어 있는데 몇 천백 년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남방의 노승 사운 굉혜가 창의하여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으니 생각건대 승려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몰려와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반드시 말하기를, "산문(山門)에 지금부터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날 것이며 법계(法界)의 큰 공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드리울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 안심사 사적비에서(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역을 바탕으로 어법에 맞게 조금 수정했다)

 

계단은 앞면과 옆면에 직사각형의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축댓돌과 비슷한 크기의 판돌을 한 줄로 길게 쌓은 위에 조성돼 있다. 판돌의 아래 부분엔 연꽃무늬를, 윗부분에는 '회(回)' 자형 무늬를 그려 넣는 등 조각 수법이 매우 섬세하고 조형미가 아름답다.  

 

계단의 중앙엔 부처의 치아 사리와 의습을 봉안했다는 불사리탑이 서 있다. 석종형 부도의 형태다. 계단 네 모퉁이에는 불사리탑을 호위하듯 신장상이 서 있다.

 

네 구의 신장상은 갑옷을 입고 양손으로 칼을 쥔 무인상이다. 그동안 많은 절집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무인상이 배치된 특이한 부도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안심사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호남평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대접전을 벌였던 배티재와 지척이다. 그 사실을 참작하면 어쩌면 무인의 모습을 한 이 신장상들은 이 지역 승군(僧軍)의 존재를 암시하는지 모를 일이다.

 

신장상의 크기도 다르다. 이로 미루어 한 곳에서 일괄적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제각기 다른 곳에서 옮겨와 한데 모아놓은 게 아닌가 추측된다. 신장상은 갑옷과 신체의 세부 표현이 매우 세련돼 보이고 양감이 매우 풍부하다. 

 

단순화된 형식과 작은 규모 등을 볼 때 안심사계단은 조선후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계단 조성을 기리려고 세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써 보내 이를 보관하려고 어서각(御書閣)까지 지었다고 하나 불에 타버리고 남아있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작은 것이 왜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산신각·삼성각
 
적광전 뒤쪽엔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바로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이곳에 올라서 앞을 바라보니, 안심사의 뒤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전망이 좋은 곳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을 한 아주 작은 건물인 산신각은 1998년에 지은 것이다. 외벽에는 산신도와 비천도 및 주악천인을 그려놓았다. 안에는 산신목각탱을 걸었으며 수미단과 용머리가 조각된 닫집이 있다.

 

산신각은 작은 것이 왜 아름다운가를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대숲과 단풍이 아름답게 물드는 갈참나무가 어우러져 이룬 배경이 산신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무릇 건물이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우쳐 주는 곳이다. 

 

계단을 내려와 계단(戒壇) 오른쪽에 흐르는 계곡물 건너편에 있는 삼성각으로 간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예전엔 칠성각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현재는 삼성각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외벽에는 나한도와 산수도가, 내벽에는 나한도와 연꽃·난초·매화 등이 그려져 있다. 삼성각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이다. 숲이 1999년에 지어진 이 전각을 매우 고풍스럽게 치장하고 있다. 안심사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을 꼽으라면 이곳을 꼽고 싶을 정도다.

 

삼성각 왼쪽, 숲의 끝으로 가면 대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좀전에 내려왔던 길이다. 등산로 옆으로는 몇 뙈기 다랑논들이 계단을 이루고 있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110호인 안심사사적비는 그곳 밭 한가운데에 서 있다. 사적비란 절에 관련된 역사나 사실을 기록해 놓은 비다.

 

조선 영조 35년(1759)에 세운 사적비는 자연 암석 위에 몸돌을 세운 모습이다. 비문은 절의 주지였던 처능의 부탁을 받아 우의정 김석주가 지었으며 글씨는 당시 이조판서 자리에 있던 홍계희가 쓴 것이다.

 

비의 내용을 보면 18c 당시의 안심사가 대웅전·약사전을 비롯한 30여 채의 건물과, 석대암 ·문수전 등의 12개의 암자가 딸려 있던 큰 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안심사 경내로 돌아와 승방으로 찾아가 인기척을 냈다. 여기서 어떻게 가야 가장 빨리 집에 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비구니 한 분이 밖으로 나왔다.

 

여기서 깔딱재를 넘어서 벌곡면 소재지로 갈 수 있는지 물었더니 길이 희미해서 가지 못할 것이라 한다. 시간만 넉넉하다면 개의치 않고 가련만 벌써 오후 5시가 지난 시각이다.

 

할 수 없이 버스 편을 물었더니 대전으로 직접 가는 것은 없고 운주나 양촌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서 다시 갈아타야 한다고 한다. 걸어서 양촌까지 간 다음 버스를 타고 논산으로 가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고은 시인의 시 '천운사운'을 닮은 안심사 풍경

 

비구니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하고 나서 안심사를 나섰다. 한가로이 걷기 시작하자 마음 한 가운데서 불쑥 고은 시인의 시 '천운사운'이 떠오른다.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우에도

그이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그이들은

밤 솔바람소리.

바위 보아

비인 산허리.

 

가을이 오데.

 

바위를 골라

나앉아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돌아가 한 번 잊은 제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바람진 산허리

 

그이들은

살데.

 

그이들은

살데.

   ―고은 시 '천운사운' 전문

 

지난여름, 난 이 시의 무대인 지리산 천운사를 찾아갔었다. 절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3시 반. 때마침 도량석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새벽 예불이 시작되었다. 극락전 앞에 서서 가만히 새벽 예불을 지켜봤다.

 

이윽고 예불이 끝나자 한 스님이 밖으로 나왔다. 스님은 뜻밖에도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였다. 시에 나타난 풍경이 아직 그대로일 것으로 생각한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깨달아야 했다. 이 시가 쓰일 당시인 1950년대 말, 천은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 천은사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대전서 왔습니다."

 

사실 이 문답은 스님과 내가 주고받을 필요가 없는 대화였다. 그것은 내가 출가자인 스님에게 "스님의 고향이 어디지요?"라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의미한 질문이다. 난 적이 실망했다. 승과 속의 경계가 분명치 못하다면 뭐하러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구태여 그 먼 곳까지 찾아가겠는가.

 

안심사에는 1950년대 말 지리산 천은사가 구현했던 정적이면서 조금은 적요로운 풍경이 던져주는 아름다움이 아직 남아있었다.

 

지옥을 모르고 어찌 극락(極樂)을 알까

 

안심사를 나섰다. 내려가다 보니 들머리에 우뚝 선 일주문이 나타난다. 거기서 몇 걸음 더 걸어가자 부도밭이 있다. 사적비에는 안심사 계단을 세울 당시 명노 스님이란 분의 주장으로 하에 수십 명의 시주 받아서 5개월 여에 걸친 공사 끝에 부도전을 세웠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부도밭은 원래는 '안심사 부도 및 부도전'이라 했으나 몇 년 전 계단이 분리되어 옮겨가고 이 자리엔 승탑들만 남아 있다. 모두 8기의 부도가 모여 있는데 부도들의 형식이 다양하다. 그러나 3기 정도를 제외하곤 온전한 것이 없다. 제 짝이 아닌 돌을 이리저리 꿰맞추어 올려놓은 모습이다. 부도의 돌 역시 한국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것인가. 만일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무가 부도밭을 감싸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소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으리라.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2Km가량 걸어가자 완창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우주요, 오른쪽으로 가면 논산 양촌이다. 십 리가량 더 걸어가서 양촌면 소재지에서 논산행 버스를 탔다. 버스 의자에 앉자 다리가 본격적으로 아파온다.. 수락리에서 마천대, 마천대에서 안심사, 안심사에서 양촌까지 많이도 걸었다.

 

오늘 자신을 너무 많이 혹사시켰노라고 다리가 자꾸만 앙탈을 부린다. 난 선승이 설법을 베풀듯이 내 다리에게 말한다. 극렬한 고통이 없이 어찌 최상의 즐거움을 알겠느냐고. 극통(極痛), 그 지옥을 모르면 어찌 극락(極樂)을 알겠느냐고. 그렇다. 괴로움의 느낌을 모른다면 최상을 즐거움이 뭔지를 어찌 알겠는가.


태그:#대둔산 , #안심사 , #안심사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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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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