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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있는 언론사 대표 두명의 이름을 공개한 가운데 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사 현판 앞에서 여성·언론·인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고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마이크를 잡은 이가 조선일보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박석운 민언련 공동대표.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있는 언론사 대표 두명의 이름을 공개한 가운데 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사 현판 앞에서 여성·언론·인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고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마이크를 잡은 이가 조선일보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박석운 민언련 공동대표.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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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회장님을 남산으로 부르고 싶다. 남산에 있는 옛날의 중앙정보부와 현재의 안기부 못지않게 회장님이 계신 태평로1가에 모든 정보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낮의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분이 계셨지만 밤의 대통령은 오로지 회장님 한분이셨다. 회장님은 정보와 인재를 적절히 용재, 용인하여 <조선일보>를 1등 신문, 최고의 기업으로 키웠다."(1992년 11월 7일 <조선일보> 사보)

이것은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의 고희연에서 당시 신동호 <스포츠조선> 대표가 행한 축사의 일부이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이런 말이 공개석상에서 무람없이 발설될 수 있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방 회장의 고희연이 있고 나서 불과 한 달여 후,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선거 다음 날 곧장 <조선> 회장 댁을 방문하여 자축 잔치를 벌인다. '밤의 대통령'이란 칭호를 처음으로 붙여준 사람은 '낮의 대통령' 박정희였다. 이로 보아 '밤의 대통령'은 결코 과장된 수사(修辭)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울러 방 회장은 '권번(券番, 기생조합) 출신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인물로 회자되기도 했다.(한홍구 저 <한국사>)

'밤의 대통령' 방일영 회장은 2003년에 작고하고 그의 동생 방우영 회장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2008년 1월 22일에는 방우영 회장의 팔순연이 롯데호텔에서 열린다. 이 자리에는 전두환, 김영삼 전직 대통령들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도 참석했다.

"앞으로 5년 일하는 동안 (언론이) 두렵다고 해서 절대 대못은 안 박겠다. 대신 전봇대를 뽑겠다…, 방 명예회장이 쓰신 책 제목이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인데 제가 80세가 되면 뭘 쓸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언론이 두려웠다'일 것 같다"(이명박 당선자의 말)

지금 <조선일보>의 대표이사는 '밤의 대통령' 방일영 회장의 자제인 상훈씨(1948년생)가, 그리고 <스포츠조선>은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고 한 방우영 회장의 아들인 성훈(1973년생)씨가 맡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자칭 '1등 신문'이었고 '최고의 기업'이었다. 그런데 이런 <조선일보>가 난데없이 무더기 송사를 벌이고 있다. 이런 일에 '안티'들이 보내는 냉소야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에는 <조선일보> 지지자들까지도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도되었듯이 <조선일보>는 10일 이종걸 민주당 의원,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과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의 신상철 대표를 고소한 데 이어, 16일에는 김성균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 대표와 박석운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그리고 나영정 진보신당 대외협력국장 등을 서울중앙지검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조선일보>는 "이들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도 곧 제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먼저 회사의 '유력 임원'이 파렴치한 의혹에 휘말린 점에 대해 <조선일보> 전 임직원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사실 장자연 사건은 그 '유력 임원'에게뿐 아니라 <조선일보> 전체에도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 '유력 임원'의 이름

조선일보사 코리아나호텔
▲ 조선일보사 코리아나호텔 조선일보사 코리아나호텔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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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장자연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벌써 40일이 넘어가고 있다. 주지하듯이 이른바 '장자연 문건'에 <조선일보>의 '유력 임원'이 올라있다는 의혹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강희락 경찰청장도 시인한 바 있다. <조선일보>는 고소장에서, "본사 임원은 장씨로부터 접대를 받은 적이 없는데도" 피고소인들이 이를 사실인 양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야 어떻든 사적인 프라이버시는 일단 보호받아야 한다. 비록 도덕적으로 지탄 받을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사적 영역은 함부로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만약 개인의 행위가 법률적으로 범죄를 구성하는 요건이 된다면 문제는 어려워진다. 범죄란 이미 공적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피의자는 일단 무죄로 추정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원칙이다. <오마이뉴스>나 <한겨레>에서 연쇄살인 피의자 강아무개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점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보도 윤리는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피의자가 공인(公人)이라고 해서 확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사건이 이번처럼 파렴치한 성격을 띠는 경우 이름이 알려지는 것 자체로 본인은 물론 본인 주변의 사람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이미 죽은 데다 문건에 기술된 내용도 구체성이 부족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여간해서 나타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리스트에 거명된 사람들을 유죄로 단정해서 함부로 이름을 밝힐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본다.

고인을 비방·매도하는 <조선>

문제는 지금까지 <조선일보>가 보여 온 보도 방식과 이번 사건에 대처하는 방식이 극도로 모순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조선일보>는 연쇄살인 피의자 강아무개의 이름은 물론 얼굴까지 최초로 밝혔다. 그때 <조선일보>가 내세운 논리는 첫째, 중대 범죄자는 이미 공인이라는 점이며 둘째, 국민의 알권리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조선일보> 34면 김대중칼럼
 <조선일보> 34면 김대중칼럼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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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조선일보>가 고인이 된 장자연씨를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자

지난 3월 7일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씨의 이른바 '문건'의 경우가 그렇다. 그 문건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정황이나 구체성 없이 조선일보의 한 고위인사가 온당치 않은 일에 연루된 것처럼 기술돼 있다는 것이다…, 장씨 자살에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 문건이 과연 장씨 자신의 의지에 의해 쓰인 것인지,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썼다가 그것이 유포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살로 도피한 것인지, 그 배후는 누군지 등등 의문점이 수두룩했다.(4월 13일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에서)

<조선일보>는 장자연씨의 문건에 '누구의 사주를 받고 썼는지' 그리고 '배후가 누군지' 등의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일보>가 이미 세상을 등진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상실했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 수사는 거의 박연차 회장의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박 회장의 진술을 생중계하듯이 기정사실화하여 보도하고 있다. 수감 중인 박 회장의 진술은 대폭 신뢰하는 반면 한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서 유서처럼 남긴 기록을 불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강아무개는 공인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공인이며, 조선일보의 '유력 임원' 역시 공인이다. <조선일보> 측도 이 점은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과연 공인 중에서도 피의사실을 발표할 수 있는 공인과 그래서는 안 되는 공인을 가리는 <조선일보>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사실 <조선일보>의 '유력 임원'이 누구인지는 이제 국민 대다수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다는 점을 <조선일보>는 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유력 임원'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사람들을 고소하고 있다.

'1등 신문'이고 '최고의 기업'이라는 <조선일보>가 이렇게 의미 없는 수를 거듭 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건 발생 40일이 지났건만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장자연씨의 전 소속사 대표 김아무개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다 경찰의 수사는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피고소자에 대한 소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 <조선일보>는 '유력임원'의 이름이 뜻하지 않게 계속 노출되고 있는 것을 더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소 남발은 위기에 몰린 <조선>의 자충수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있는 언론사 대표 두명의 이름을 공개한 가운데 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사 현판 앞에서 여성·언론·인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고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종걸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있는 언론사 대표 두명의 이름을 공개한 가운데 8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 호텔 조선일보사 현판 앞에서 여성·언론·인권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고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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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여전히 막강한 언론권력임은 분명하지만 어디 옛날 '밤의 대통령' 시절만 하겠는가? <조선일보> 대표는 지난 2006년 6월 대법원에서 탈세와 횡령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의 형을 확정 받은 상태였다. 작년 이명박 대통령의 8·15 특별사면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도 집행유예 상태로 남아 있어야 했다.

초조하게 고소를 남발하는 모습에서 <조선일보>의 위기가 엿보인다. 이것은 옛날 <조선일보>의 모습이 아니다. 명색이 '권번 기생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 준' 것을 자랑하던 밤의 대통령이 버티던 <조선일보>였다. 그런데 이제는 구차하게도 무명에 가까운 탤런트와, 그것도 밤에 엮인 사건으로 송사를 벌이고 있는 형국이니 '밤의 대통령'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조선일보> 사람 중에는 자괴감을 느끼는 분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개인감정으로만 끝나야 한다. 대부분의 공인이 그렇지만 특히 <조선일보>의 '유력 임원'은 얼마든지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유력하고 막강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김대중 고문 같은 임원을 대신 내세우거나 <조선일보> 법인을 시켜 송사나 벌일 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는 자충수에 불과하다.

예전에 가수 나훈아는 공인의 신분을 십분 이용한 기자회견을 수단 삼아 자신을 짓누르던 괴담을 극적으로 일소한 바 있다. 그러나 나훈아는 괴담을 퍼뜨린 어떤 누리꾼에게도 송사 따위를 걸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전쟁과 사람>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조선일보, #장자연, #밤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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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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