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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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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유럽 여행기는 감탄기, 자랑기, 자기식대로 즐기기다. 예쁜 사진 속의 여행자들은 일단 유럽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세련된 문화인으로 거듭 난 듯한 포즈로 웃고 있다. 만약 당신도 나처럼 시기와 질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면, 세상의 90퍼센트의 유럽여행기가 이런 책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여행기들은 우리의 염장만 지를 뿐이다. 빌 브라이슨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건 마치 도서관에서 죽어라 고시공부하는 놈에게 와서 어제 밤 나이트클럽에서 팔등신의 여자를, 혹은 구준표와 같은 꽃미남을 꼬셔서 광란의 밤을 보낸 이야기를 생생하게 중계하는 친구같은 그런 책이다. 차라리 듣지도 말고 읽지도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은...

이런 유럽 여행기들에 식상해질 무렵 빌 브라이슨의 유럽 여행기를 읽게 되었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은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해박한 유럽의 지식인이 쓴, 편견과 불평으로 가득한 유럽 여행기인 것이다.

빌 브라이슨, 미국인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닌

빌 브라이슨은 엄밀히 말해 유럽인은 아니다. 미국 태생이지만 20여년 동안 영국에 살면서 <더 타임즈>나 <인디펜던트> 등 거의 모든 매체에 기고를 해 온 칼럼리스트이자 여행작가이고, 10년 전 다시 미국에 돌아가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은 특정 문화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냉정한 관찰에서 비롯된 유머와 재치가 넘친다. 일단 어떤 사물, 어떤 사람이든 그의 눈에 띄어 그의 머릿속을 통과하는 순간 즐거운 얘깃거리로 바뀐다.

지난 1년간 국내에는 그의 저서들이 봇물 터지듯 출간 되고 있다. 과학에 대한 흥미로운 백과사전인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미국 동부 '에팔라치아 트레일' 여행을 소재로 하여 현대 기행문학의 대표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나를 부르는 숲>은 이미 오래 전 출간 된 바 있다.

지난 해에는 <빌 브라이슨의 재미있는 세상 (The)Life and Times of the Thunderbolt Kid>,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 올해에는 <빌 브라이슨의 미국학 I'm a stranger here myself : notes on returning to America after twen>이 출간 되었다. 조금 오래 전에 출간 된 두 권의 명저가 워낙 훌륭하기도 하지만, 한국에 빌 브라이슨 애독자들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책은 역시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neither here nor there>일 것이다. 이 책은 장황하지만 유쾌하고, 가벼운가하면 날카로운 그의 매력이 잘 살아있는 여행기이다.   

불평의 미학

그의 머릿속을 통과한 유럽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유럽을 갔다 와서 뭔가 명확하지 않고 찜찜한 느낌으로 남아있던 지점을 콕 찝어준다는 점에 있다. 쉽게 말해 그들에 대한 환상을 제대로 한꺼풀 벗겨준다. 이러한 지적 호기심에 복합적인 열등감이 더해진 결과는 기대 이상이다. 물론 이 책의 주 메뉴는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감성적인 기록과 꼬박꼬박 찾아가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들려주는 박학다식한 빌 브라이슨 만의 해설이다.

하지만 본 서평에서는 여행기중독자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인 그의 불평불만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유럽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배울 만큼 배웠고 들을 만큼 들었거니와, 이러한 뒷담화야말로 누구나 처음 유럽에 갔을 때 겪게 되는 묘하게 찾아오는 서유럽 사람들의 실망스런 태도에 대한 좋은 멀미약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의 불평을 통해 대리만족을 즐겨보자.

오로라의 일정에 맞추다보니 여행의 시작점이 된 노르웨이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그리고 스위스는 엄청난 세금으로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털어간다. 그리고 그 세금으로 자국민들에게는 풍요로운 복지를 주고, 아쉬울 것 없는 그곳 사람들은 여행자들에게는 도도한 태도로 맛없는 음식을 던져준다. 싫으면 오지 말라는 식으로.

그는 영국 사람답게 EEC(유럽경제연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혼자 하는 여행길이니 만큼 이 책에서는 혼자 질문하고 답하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EEC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이렇다.

질문 : EEC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을까?
답 : 3분의 1만 일을 한다.

독일 사람은 천성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근면 성실하다. 한때 나치에 경도된 바 있으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는 합리적인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을 포함한) 그들은 '농담이 범죄라도 되는 듯 행동하는 재미없는 사람들'이고,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한다. 인정은 하되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사람들인 모양이다.

그의 독설은 프랑스 파리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대목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는 영국인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프랑스인들은 손님이 오면 쏘아보며 눈으로 '넌 뭐야?'라고 묻는다. 음식점에서는 손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웨이터들 때문에 주문하는데만 45분을 기다려야 하고, 주문한 다음 음식이 나오면 25초 안에 해치우고 꺼지라는 듯 웨이터들이 눈총을 준다.

거리에서는 적개심에 차서 돌진하는 차들을 피해 다녀야 한다. 실제 차가 없던 시절의 기록을 보아도 프랑스에서는 유독 마차에 치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관광지에서는 입장권을 사기 위한 줄이 줄지 않는다. 앞에서 계속 새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는 사용료를 받는 아줌마가 오줌 누는 모습을 노려본다. 바닥에 흘리는지를...(화장실 지킴이는 이제는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그들을 지켜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마워하지 않으며, 합성수지로 만든 '부유하고 우매한 인간의 상징'인 퐁피두센터를 지었다.

그리고 프랑스 사람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몇 가지 농담도 인용한다.

영국 신문에서 영국 기업인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 가장 싫어하는 것 세 가지는?
정원에 두는 못생긴 요정 조각상, 자동차 유리에 매다는 주사위, 그리고 프랑스 사람.

또 크리스토퍼 히버트는 16세기에 쓴 <여행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수다스럽고 신뢰하기 어려우며 지독히 부패하고, 독일인은 식탐이 많으며, 스위스 사람은 짜증이 날만큼 거만하고 정리정돈을 좋아하고, 프랑스 사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프랑스인 답다'.

꼭 프랑스가 아니더라도 까탈스러운 그의 불평은 끝이 없다. 곳곳에 등장하는 친구인 카츠(그는 <나를 부르는 숲>에서도 등장하는 못 말리는 고문관 친구이기도 하다)와 함께 했던 20년 전 유럽 여행에 대한 추억도 그 때 그 짜증을 떠올리는 것이고, 지나가는 혹은 옆자리의 사람에 대한 불평불만도 쉼없이 늘어놓는다.

결국 그는 아름다운 풍경, 박물관 탐방, 해만 나오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을 드러내놓고 선탠을 하는 예쁜 여자들 구경으로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다가 태양이 그리운 나머지 예정된 도시들을 훌쩍 뛰어 넘어 이탈리아 로마로 내려온다.

불평의 절정이 파리였다고 한다면 찬사의 절정은 이탈리아의 소렌토와 카프리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만약 이곳들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라도 팔 수 있고, 대머리가 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인 못지않게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이탈리아인들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거만하지도 않고, 카페에 앉아서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며, 물가도 적당하다. 물론 이탈리아 사람들은 성실, 근면과 담을 쌓아서 여러 가지 (예를 들면 그 귀중한 문화재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다던가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빌 브라이슨에 의하면 이조차도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잘 생기고, 머리 좋고, 활달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근면하기까지 하다면 다시 세계를 정복하는 일도 시간문제일 것이기 때문!

그의 여정은 동유럽을 거쳐 터키 이스탄불에서 끝이 난다. 터키의 해변에 서서 바다 건너 아시아가 보인다. 그는 바다 건너로 여행을 계속 하고자 하는 몸의 관성을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이 끝도 없을 욕망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편안한 잠자리가 있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간다.

떠날 때 꼭 가져가야 하는 것

모든 여행기가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는 매우 강한 중독성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일단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게 된다. 그의 해박한 지식을 총동원하며 시시콜콜한 역사와 문화에 대해 풀어 놓는다. 그리고 여정과 여정 중에 생긴 일, 그 때 그곳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놀라울 만큼 꼼꼼하게 기록한다. 계속 투덜거리는 그의 여행기를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은 이러한 성실한 기록에서 나온다. 사실 이렇게 시종일관 투덜거리기도 쉽지 않은 노릇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는 단련된 여행가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미덕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인상이 더러운 도시라고 하더라도 어느 구석엔가는 숨어있을, 나의 감성과 기대를 자극할 만한 장소들을 끝끝내 찾아내고야 마는 여행가적 근성이 그것이다. 여행자들에게는 넉넉한 경비와 착용감 좋은 복대, 여행지에 대한 사전 지식도 중요한 준비물이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파리에서 조차도 '역시 오길 잘했군' 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투혼이야 말로 꼭 가져가야 할 준비물일 것이다.

이제 빌 브라이슨의 다른 여행기들이 나를 부른다. 여행기중독자는 그와의 여행을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을 진정시킨다. 그저 그런 여행기들에 싫증 날 때를 위해...

덧붙이는 글 | 여행기중독자 입니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21세기북스(2008)


태그:#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21세기북스, #빌 브라이슨,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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