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악의 경제난으로 소비가 줄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 봄, 입을 게 없다"는 딸의 하소연에 "옷장부터 정리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괜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 요즘입니다. 비단 아껴 쓰는 것에서 나아가 '다시' 쓰고, '나눠' 써도 "괜찮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불황이 낳은 또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그 곁을 따라가 봤습니다. [편집자말]
"김 실장, 책 만드는 사람이 종이를 너무 하나만 고집하면 안 돼. 이번만 해도 인쇄할 때 얼마나 지분이 날리는지 인쇄기가 몇 번 섰다니깐. 저번에는 로스율이 얼마나 컸어. 그게 다…."

인쇄소 부장님의 불만과 잔소리가 이어진다. 이럴 땐 줄행랑이 최선. 바쁘다는 핑계로 슬금슬금 내뺄 태세를 갖추다가 후다닥 인쇄소를 박차고 나온다. 내가 만드는 책에서 만큼은 재생지를 사용하리라 결심하고, 이를 현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기껏 만들었더니, '제본책보다 못하다'니...
단행본용이 아닌 재생지를 사용하다보니 앞의 책의 경우 책 넘김이 좋지 않은 것이 보인다.
▲ 재생지 단행본용이 아닌 재생지를 사용하다보니 앞의 책의 경우 책 넘김이 좋지 않은 것이 보인다.
ⓒ 김보경

관련사진보기

책이라는 게 편집자 혼자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작업인데, 내 별난(?) 고집으로 폐를 끼친다는 게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도 재생지 사용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작업의 편의성과 노력 대비, 결과물의 '뽀대'를 따진다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독자다.

'…이 좋은 책을 제본책보다 못하게 펴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화난다. 다른 출판사가 다시 출판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온라인 서점에 올라온 한 독자의 리뷰를 보고 절망했다. 그동안 '종이가 구리다, 후지다'라는 리뷰는 봤지만 이 리뷰는 치명적이었다. '제본책보다 못한'이라니. 책에다 재생지를 사용했음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설득'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종이 질만이 아니라 단행본용이 아닌 재생지를 억지로 사용하다 보니 책 넘김 등 제본에도 문제가 있는데 독자가 그걸 정확히 알고 느꼈다는 것이니까, 별 수 있으랴. 자기 만족으로 재생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독자들을 설득하면서 천천히 함께 가는 게 앞으로 내 몫임을 깨우쳐준 것이다. 맞는 말이니, 써도 달게 삼켜야지.

대책 없는 자신감이 낳은 무한도전

사실 1인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재생지 사용 '똥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건 내 심각한 단순함의 결과이다. 동물 전문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나무와 환경이 보존되어야 동물도 산다. 그러려면 나무를 베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단순화해서 생각하니 답은 뻔했다. 재생지 사용.

잡지 기자 출신으로 '제작'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출판을 덜컥 시작하면서 일단은 남들 따라, 남이 내는 책과 똑같이 만드는 게 최선이건만 당장 3번째 책부터 재생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 이 대책 없는 자신감이여!

게다가 그간 <녹색평론>이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 등에서 사용하고 검증되었던 중질지나 사용하면 좋으련만, 그보다 좀 더 좋은 질의 재생지를 찾겠다고 온 사방을 뒤지고 다닌 무모함까지. 당연히 그런 종이가 있을 리 없는데, 그때 내 눈에 띈 게 고지율 100%(나무를 하나도 베지 않고 폐지만을 재사용해 만든 종이를 의미) 재생지였다.

'덜컥' 이 종이를 사용해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문제가 없었느냐? 당연히 하자가 있었는데 바로 단행본용이 아니라는 것. 이후 나는 단행본용이 아닌 종이를 사용해 단행본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아프게 배우게 되었다(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몸소 증명한 셈이다).

"실장님, 이거 종이 결이 맞지 않는데요? 어쩌죠?"
"이 재생지는 책에 맞는 사이즈가 없어요. 이 재생지에 맞춰서 인쇄하려면 로스율이 30%인데요. 종이 값이 30%나 더 든다는 얘기잖아요."

재생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매번 책을 낼 때마다 전쟁을 치렀다. 단행본용 종이가 아니다 보니까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었다. 독자들은 책 넘김이 나쁘고 질 나쁜 종이의 책을 보게 되는데 오히려 종이 값은 더 들다보니 재생지를 사용하면서도 책값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 번 재생지 사용을 포기하면 이런저런 핑계로 사용하지 않을 게 뻔하니,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재생지 사용'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때로는 하나만 보고 가는 '돌쇠형' 기질도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왜 재생지를 쓰는데? 싼 것도 아니잖아"

재생지지만 컬러나 흑백 인쇄 모두 많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 재생지 재생지지만 컬러나 흑백 인쇄 모두 많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 김보경

관련사진보기

재생지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는지, 그때마다 나는 종종 '잡지사 다니덜 시절, 나무를 마구 벤 벌을 지금 받고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시절 나는 수입지가 최고로 좋은 종이라고 생각했다.

잡지는 광고의 종류에 따라 종이를 달리 쓰는데 명품 광고는 광고비를 많이 내니까 두껍고 인쇄가 잘 되는 최고급 수입지를 많이 사용했다.

번쩍이는 명품 광고 뒷면에 내 기사가 멋지게 인쇄된 것을 볼 때면 '오호, 이번 달 재수 좋네'했다가, 후진 종이에 내 기사가 실려 기껏 고생해 촬영하고 쓴 기사가 나쁘게 인쇄돼 나오면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참으로 무식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도 아마존과 인도네시아 원시림이 파괴되는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던 우리 어머니 왈, '세상사 고민 혼자 다 하는 인간형'이었지만 정작 원시림 파괴와 내 생활을 연관시키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

그렇게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잡지에 어떤 종이를 쓸지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자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했으니까. 그러다가 출판을 시작하고 내 손으로 종이를 발주하게 되자 '이 순간 나무가 잘리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니 맨 정신에 재생지가 아닌 종이를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면서 도대체 왜 재생지를 쓰는데? 싼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면 소심하게 답한다.

"그러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세상에서 다르게 살려니 그 값을 치르는 거지, 뭐. 독자들도 화려하지 않고 어두운 종이가 거슬리겠지만 그래도 가벼우니까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무를 베지 않았잖아." 

'재생지라서 더 좋아'라고 할, 그날을 위해 

아무리 지가 좋아 하는 일이라도 호응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끝까지 재생지를 쓰겠는가. 그야말로 마스터베이션 아닌가. 다행히 재생지 사용을 응원해주는 독자들과 가끔 재생지에 관심을 갖고 묻는 다른 출판사의 편집자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

이외에도 재생지 관련 갖가지 문의를 받고 있는 '야매' 재생지 상담소 역할도 하고 있는데, 때로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예쁘고 반갑다. 꽤 소심하고 의지박약한 편이라 옆에서 이렇게 토닥거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앞으로 나갈 추진력이 생긴다.   

때로 재생지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만난다. 국산 재생지가 없다, 재생지가 더 비싸다, 폐지에서 먹을 빼는 과정에서 쓰는 화학약품 때문에 오히려 재생지가 반환경적이다 등.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얻어들은 지식을 총 동원해 열심히 정답을 알려주지만 내가 전문가가 아니므로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한국에서 재생지에 관한 논의가 더욱 활발히 공론화되어서 이런 오해가 말끔히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 커진다.

재생지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다시 쓰고 적게 쓰는 것에 대한 관심과 함께 갈 것이다. 그러다 사람들이 언젠가 '재생지라도 괜찮아'가 아니라 '재생지라서 더 좋아'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출판사의 재생지 사용 좌충우돌은 현재진행형이다.


태그:#재생지, #재생용지, #동물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가 사랑하고, 먹고, 입고, 즐기는 동물에 관한 책을 내는 1인출판사 책공장더불어를 운영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