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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옆에서 먹는 점심 맛이라니, 정말 꿀맛이네요"

"우리는 지금 남한에서 제일 높은 땅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겁니다. 역사적인 순간이지요, 허허허."

 

얼어붙은 눈길을 헤치고 오른 한라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는 일행들이 감개무량하여 하는 말이다. 바람이 조금 일긴 했지만 온화한 날씨에 눈 아래 펼쳐진 백록담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해발 1950미터인 한라산 정상은 날씨가 변덕이 심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모습을 바꾸는 변화무쌍한 산이다.

 

그런데 이날은 날씨가 맑고 온화하여 정상 부근에 만들어 놓은 평상 위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게 되었으니 일행이 감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침에 호텔을 나설 때 식당 측에서 마련해 준 도시락은 평상시 나오는 음식들에 비해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제주도 여행 둘째 날인 3월 24일 숙소를 출발하여 한라산 중턱에 있는 성판악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경이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날인 22일부터 건강상태가 나빠져 걱정했던 아내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산길로 나서자 아내가 맨 앞장을 섰다. 나는 평상시와 같이 맨 뒤에서 일행들을 뒤따랐다.

 

바위 의자에 앉아 쉬는 나무? 보고 즐기는 즐거움은 스스로의 몫

 

"어머, 저 굴거리 나무 좀 봐요? 귀한 나무인데 여긴 지천이네."

 

일행이 놀란 듯 가리킨 것은 잎자루가 붉고 잎이 제법 길고 넓은 교목이었다. 남쪽 지방에 자생하는 굴거리 나무는 새 잎이 핀 후에 묵은 잎이 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쪽 한계선인 내장산에 자생하는 굴거리 나무는 천연기념물 9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 귀한 나무다.

 

 

굴거리 나무는 진달래 대피소에 이르는 구간 곳곳에 정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이 구간에는 조릿대 나무도 많아 키는 작았지만 아늑한 푸른 숲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한라산에는 수많은 수종의 나무와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지만 특히 눈에 많이 띄는 것이 키가 쭉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와 소나무, 줄기가 하얀 사스레 나무, 그리고 소나무와는 모습이 다른 구상나무 등이었다.

 

"저 나무 좀 봐? 나무도 다리가 아픈 건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네, 거 참, 허허허."

"호호호, 정말이네요, 나무가 의자에 앉아 쉬고 있나 봐요?"

 

친구가 껄껄 웃으며 바라보는 길가에는 상당히 큰 나무 한 그루가 정말 바위를 의자 삼아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여행길에서나 등산길에서나 작은 볼거리를 놓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바위에 걸터앉은 모습의 나무를 바라보며 즐겁게 웃음보를 터뜨린 친구부부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산길 군데군데 개울을 건너는 나무다리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개울은 하나같이 말라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그리 깊지도 않은 개울에 다리는 왜 만들어 놓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여름철에 비가 많이 내릴 때 흘러내리는 물을 건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화산섬 제주도 한라산 골짜기에 물이 흐르지 않는 이유

 

겨울철이나 초봄이라고 해서 한라산에 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 올라가는 높은 지대의 길은 온통 두껍게 얼어붙어 있던 눈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길과 골짜기에도 물이 조금씩 고여 있었다. 그러나 상류의 물줄기는 아래쪽으로 흐르지 못했다. 제주도 전 지역과 한라산의 독특한 지질 때문이었다.

 

 

화산섬 제주도는 현무암석 지대여서 지층이 단단한 진흙구조인 육지와 달리, 푸석푸석한 지질이어서 적은 량의 물은 그대로 땅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천지연 폭포가 비가 그친 후에는 곧 인공폭포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아니 누가 산길에 등산화를 벗어 놓고 갔지? 길이 온통 돌과 자갈길이어서 맨발로는 걷기 어려울 텐데..."

 

앞서 걷던 일행이 길가에 벗어 놓은 등산화 한 짝을 바라보며 걱정을 한다. 누가 등산길에 등산화를 벗어 놓고 갔을까? 그러나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까지 등산화의 주인공은 만날 수 없었다.

 

길바닥이 굵은 돌과 자갈길이어서 걷기가 썩 편한 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등산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매우 힘들어 했을 아내도 이날은 별로 힘든 기색 없이 앞장서 잘 걷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달래 대피소에 이르자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제주도에 수학여행 온 중고등학생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고등학생에게 물으니 부산에서 왔다고 한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아내가 여전히 앞장을 서서 걷고 있는 모습이 여간 고맙고 대견해 보이지 않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내는 이곳 진달래 대피소에서 쉬게 하고 다른 사람들만 정상까지 오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진달래 대피소를 출발하여 조금 오르자 얼어붙은 눈길이 나타났다. 눈이 두껍게 얼어 있기는 일반 등산로나 나무 계단길이나 마찬가지였다. 길가 숲속도 눈이 두껍게 얼어붙어 있었다. 눈길은 마침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녹아 미끄러웠다.

 

운동화 신고 오른 영동 할아버지의 침술 의료봉사

 

모두들 아이젠을 꺼내 착용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학생들은 대부분 미끄러운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잘도 걷는다. 그런데 조금 더 올라가자 드러누워 있는 학생을 노인 한 분이 돌보고 있었다.

 

다가가 살펴보니 학생은 미끄러운 눈길이 힘들어 다리에 쥐가 난 것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학생을 발견한 노인이 가방에서 작은 침통을 꺼내놓고 아픈 부위에 침을 놓고 있었다. 침을 몇 대 맞은 학생은 금방 일어났다.

 

71세인 노인부부는 충북 영동에서 온 노인들이었다. 이들 노부부도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미끄러운 눈길을 아주 익숙하게 걸었다. 노인은 자신이 사는 고장이 산골이어서 이 정도 눈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금 더 올라가자 이 노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또 다른 학생들이 있었다. 바로 정상으로 오르는 오름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길 밑이었다. 이곳까지 허둥지둥 장난치며 올라온 학생들 몇이 역시 다리에서 쥐가 나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들 학생들은 평소 등산 경험이 없는 데다 운동량도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한라산을 오르다가 다리에 쥐가 난 것이다. 아직 젊고 팔팔한 고등학생들이었지만 등산 경험이 없는 그들에게 한라산은 결코 만만한 산이 아니었던 셈이다.

 

이들도 결국 노인의 침을 몇 대씩 맞고 일어나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코스는 나무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까악! 까악! 까마귀 떼 소리가 시끄럽다. 산 아래쪽을 까치들에게 빼앗기고 높은 산 위로 밀려난 까마귀들이었다.

 

까마귀 떼가 시끄러운 정상 가까운 비탈에는 바닥에 달라붙듯 살아 있는 식물들의 모습이 특이하다, 누워 있는 향나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눈향나무들이었다. 한라산 정상의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을 견디며 사느라 위로 자라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사는 식물들은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한라산 정상에 무사히 오른 고마운 아내와 눈향나무, 까마귀 떼의 특이한 풍경

 

정상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의 대부분 수학여행 중인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틈을 비집고 정상에 올라서니 발아래 백록담이 펼쳐졌다. 안벽 한쪽은 하얀 눈이 아직 남아 있고 한쪽 바닥에만 물이 고여 있었다.

 

 

"우와! 백록담이다. 저 환상적인 모습, 우리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두 번의 실패를 거쳐 세 번째만에 한라산 정상에 오른 친구부부가 탄성을 터뜨렸다. 맑고 온화한 날씨에 올라 밝고 깨끗한 얼굴을 드러낸 백록담을 바라보는 감회가 이들 부부에겐 남다른가 보았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은 백록담뿐만이 아니었다. 휘휘 둘러보는 제주도의 풍경이 섬을 벗어나 바다 멀리까지 그야말로 일망무제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남쪽 멀리 아스라한 고구마 모양의 섬은 분명히 마라도였다. 제주 시가지와 서귀포 시가지가 넓은 치마를 펼쳐 놓은 것 같은 평원의 끝 바닷가에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는 풍경도 아름다웠다.

 

"날씨도 좋고 포근한데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내려가기로 하지."

 

마침 정상 부근에 있는 평상 하나가 비어 있었다. 친구들 네 명과 그 부인들까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열 명이 모두 정상에 오른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특히 전날까지만 해도 도저히 정상에는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아내가 정상까지 무사히 오른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자, 정상에 올랐으니 정상주 한잔씩 들고 건배해야지?"

 

친구들이 나에게 건배를 주문한다.

 

"자. 그럼 남한에서 제일 높은 땅에 올라 점심을 먹으며 건배를 하게 됐으니 건배의 의미도 크고 높게 해보도록 하지. 백두산까지 울려 퍼지도록 조국의 평화통일과 우리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위하여!!!!!!!!!"

 

나의 선창에 따라 일행들의 우렁찬 건배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짝짝짝 박수를 친다. 주변에서 점심을 먹던 다른 등산객 몇 명이 역시 잔을 높이 들며 우리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남한 땅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얼어붙어 있는 눈이 녹아내리는 길은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조심조심 내려와 성판악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라산, #남한, #제1봉, #이승철, #맛있는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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