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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다음으로 밝은 색이 노란색입니다. 빨강, 파랑, 보라와 함께 대표색채로 '경멸'을 뜻하기도 하고, 노랑장미는 '질투'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이 곳 북한강 상류 산골짝에 봄을 알리는 꽃 중에 가장 선명한 색상이 노란 색입니다.

꽃샘추위가 한창, 뒷동산에 산동백과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오를 무렵입니다. 이젠 봄이 오려나 싶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봄보다 이상한 '질투증세'가  감지됩니다. 얼굴색이 노랗게 물들어옵니다. 산수유와 산동백 색깔 그대로입니다. 얼굴은 물론 가슴, 눈알까지 노란 꽃이 피어오릅니다.

산수유 피기 시작하면 꽃샘추위의 황량함을 단숨에 바꿔놓는다.
 산수유 피기 시작하면 꽃샘추위의 황량함을 단숨에 바꿔놓는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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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산동백, 산동백은 꽃잎이 다섯개가 모여 앞치마를 두르고 산자락을 휘감는다.
 샛노란 산동백, 산동백은 꽃잎이 다섯개가 모여 앞치마를 두르고 산자락을 휘감는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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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병원 응급실,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웬 아픈 사람이 저리도 많은지… 담도가 붓고 쓸개즙이 막혀 담즙을 걸러내지 못한다 합니다. 담즙이 퍼져 황달이 심하고 '담도암'이 걸렸답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잘못하다간 금세 죽을 수도 있는 악성종양이랍니다. 평생 병원 문을 처음 찾아온 사람에게 내린 선물치곤 참 고약스런 병명입니다. 난 아직 더 살고 싶고 더 살아야할 육십 대, 인생을 즐길 나이인데 말입니다.

영상실. 마취를 해 담도에다 대롱을 박습니다. 담즙을 몸 밖 대롱을 통해 빼내는 시술입니다. 대롱을 꼽아 호스를 두 군데나 늘여 밖에서 담즙을 받아내는 현실, 기막힐 노릇입니다. 팔자에 없는 담즙 대롱과 통을 두 개씩이나 몸통옆구리에 달고 다니려니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담즙이 아름답도록 노랗습니다. 그나저나 이를 영원히 달고 다니면 어쩌나 사뭇 걱정이 됩니다. 답답해 '담즙 꼭지를 언제쯤 떼어내게 될까요' 하니 시간이 되면 꼭지는 스스로 떨어지게 마련이라며 보채지 말고 시간을 기다리라합니다.

일주일이 지나 황달이 가라앉을 무렵 담도암 수술을 한답니다. 그러나 담도암 수술은 메스를 댈 수 없답니다. 새로운 암치료법인 광역동 치료(PDT)인 레이저(Laser) 광과민제를 정맥으로 쏘아 종양세포를 파괴하는 특수한 치료법이랍니다. 개발된 지 얼마 안 돼 담당 의사님은 나보고 '복 받은 사람'이랍니다. 한 시간 정도의 내시경 치료를 하는 동안 혼미한 상태에서도 계속 기도를 올렸습니다.

죽어도 좋으니 무사하기만 바랐습니다. 잘못되어도 억울할 게 하나도 없는 삶이라 다짐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마취중인데도 담관을 뚫고 들어가는 레이저 파장이 떨리는 듯합니다. '무사해지이다, 무사해지이다'하고 헤매다 깨어났습니다. 눈을 떠보니 살아있습니다. 몸은 나른해 녹초였으나 또 '고맙습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산수유는 화려하지만 수선을 떨지 않는다.
 산수유는 화려하지만 수선을 떨지 않는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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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백은 천국계단을 쌓고 융단을 짜며 산자락을 수놓는다.
 산동백은 천국계단을 쌓고 융단을 짜며 산자락을 수놓는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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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기다렸으나 대변 소식이 없습니다. 죽다 살아난 수술에 신진대사작용이 원활하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변비가 온 것입니다. 어쩌면 좋을꼬. 힘을 주나 아래는 막히고 위에선 내리 밀고…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큰 것을 빼내려고 힘을 쓰다 보니 항문은 찢어질듯 아파오고 하늘이 점점 더 노래질 수밖에… 가여운 목소리로 또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 부처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를 살려주십시오.'

용을 쓰다 땀이 범벅이 되어 정신을 차려보니 수련의가 커다란 주사기를 들고 나타납니다.

"뭐하시려나요."
"아버님을 살려드리려 구요."
"…?"
"처녀 선생님께서요."
"걱정되세요? 제가 관장시술 전문입니다."
"아니, 처녀 의사께서… 이 무슨?"
"뭐하세요, 어서 팬티를 벗으세요."
"네, 네, 벗겠습니다. 처녀 의사님"
"벗으셨으면 저를 따라해보세요, 아버님."

처녀 의사님에게 개구리가 납작 엎드려 엉덩이를 하늘을 향해 살짝 들어 올린 모습을 보입니다. 우스꽝스러워 웃음이 킥킥했으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엎드리자, "아버님, 잘하십니다"라며 비썩 마른 엉덩이를 철썩 내리치는가 싶더니 항문에다 주사기를 넣고 대장 속으로 약물을 투입합니다. 아파 죽을 맛이었으나 약물 넣는 소리가 시원해 좋습니다.

집사람 말로는 관장 시술 후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수발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니 마음고생이 오죽했으랴 싶습니다. 주책없이 쏟아지는 오물,  추한 모습에 꼴이 말씀 아니었으나 이때만큼 마누라님께 고마움을 느껴보긴 처음입니다. 남자가 왜 여자를 존경해야하는지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담도시술이 성공적이고 경과도 좋다 합니다. 한 달여 만에 퇴원해 북한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쪽빛강물이 파랗습니다. 꽃샘추위가 물러가려는지 하얀 물안개가 가물거리고 따사로운 봄볕이 긴 강나루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눈물이 찔끔, '의사님 고맙습니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당신 생각이 다 옳았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또 연신해댑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리 고마울 수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과 농어촌공사 웰촌포탈, 북집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윤희경수필방을 방문하시면,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담도암, #광역동치료, #관장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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