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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국방부가 난데없이 이른바 '불온서적 23권'을 선정해 웃을 일 없는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주더니 이번에는 불온서적 지정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군 법무관 2명을 파면해 또 한 번 국민들에게 큰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국방부가 선보인 옛날 개그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대략 난감한 이들이 비단 저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국방부의 구시대적 행태에 국민들은 어이를 상실하고 실소가 터져 나오지만 파면당한 군 법무관들은 일정 기간 동안 법률가로서 자격이 정지되기 때문에 웃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국방부의 이해할 수 없는 군 법무관 '파면'

 

군 법무관들은 장병들의  행복 추구 등 '기본권'에 관심을 갖고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군 위신 실추'며 '품위 손상'이라는 것인지 국방부의 판단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군이 아무리 명령에 죽고 사는 조직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마저 '복종 의무 위반'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굳이 국방부 처지에서 이해해보자면 국방부가 결정한 일을 국방부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이의를 제기했으니 괘씸하다고 여길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밉다고 해서 '파면'까지 해 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여겨집니다.

 

국방부는 이번에 군법무관들을 파면함으로써 다시 한 번 불온서적 지정이 옳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며 지정당한 23권의 책은 여전히 국가안보를 저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셈입니다. 만일 국방부가 불온서적 지정이 시대를 거스르는 구태라고 생각했다면 불온서적을 해금(?)하는 조치를 취했어야지 군법무관을 파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국방부의 논리와 판단대로 보자면 저와 같은 도서관 사서들은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거의 대부분의 사서들이 불온서적으로 지정당한 23권의 책을 자신이 근무하는 도서관에 비치하여 수많은 도서관 고객들에게 이용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도서관 사서들은 불온서적 지정에 반대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유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적지 않은 사서들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을 비웃듯 보란 듯이 불온서적을 추천도서로 선정하여 도서관 홈페이지에 서평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국방부 처지에서 보면 이런 도서관 사서들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불순분자일 것입니다. 또한 도서관은 불온한 사상의 온상으로 폐쇄되어 마땅할 기관일 것입니다. 만일 국방부에 도서관 사서들의 생사여탈권을 쥐어준다면 단순히 파면이 아니라 국가안보를 위협했다는 혐의로 구속을 시켜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불온서적들은 원래 도서관에서 이용이 그리 많지 않던 책들입니다. 하지만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관심과 이용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즉 결과적으로 국방부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책들을 스스로 홍보해준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불온서적을 읽었으니 참 이율배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부기관의 서로 다른 기준, 국민들도 혼란스러워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대한민국 학술원에서는 매년 기초학문분야 우수학술도서를 선정해 무료로 전국의 도서관에 배포하고 있는데 선정된 도서 중에는 국방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우수학술도서에도 불온서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정부기관이지만 한쪽에서는 불온서적이라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우수학술도서라고 하니 좋은 책을 선정해 도서관 고객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도서관 사서 처지에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불온서적 지정 이후 도서관 이용객들의 반응 역시 상반됩니다. "불온서적 도서관에서 가면 빌려 볼 수 있어요?"라고 관심을 갖고 묻는 이들이 늘어나는 한편 "도서관에 불온서적이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우려는 나타내는 이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도서관 사서들 중에도 불온한 주제를 다룬 책 구입을 꺼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불온서적 지정이라는 국방부의 구시대적 삽질 개그로 인해 그동안 좋은 책을 선정하는 기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검열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책을 두고 국가기관이 각기 다른 판단을 내놓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방부 본의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사상의 자유가 침해되었고, 독서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서 자율성과 다양성을 제한하는 것은 창조적 발전의 토대를 허물어트린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국방부는 나라를 지키는 데 온 힘을 기울어야 합니다. 특히나 지금은 남북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경색되어 있고, 미국 정권 또한 바뀌어서 한미 군사동맹을 재정립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국가안보에 만전을 기해야할 시기에 한가롭게 불온서적 타령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불온서적 지정과 군법무관 파면을 없었던 일로 하고 국방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국방부에 바람이 있다면 좋은 책을 판단하고, 건전한 독서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저술인, 출판인, 사서 등 관계자들과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사람의 생각을 제도와 강압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다는 오만함을 하루 빨리 버리길 빌겠습니다.


#불온서적#군법무관#파면#도서관#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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