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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실시한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가 공개된 지 한 달여가 지났음에도 교육계는 지금까지 그로 인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평가 결과에 조작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었고, 일부에선 그 조작이 사실로 드러난 이 마당에도, 많은 학교들과 지역교육청, 시도교육청은 앞다투어 학생들의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성적지향주의는 내년이 되면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내년부턴 학교별 성취도 결과가 각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되고 고교 선택제가 확대되기 때문. 여기에 대학 입시 자율화 등이 맞물릴 경우,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성취도 올리기 경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벌써 일제고사로 인한 부작용이 학교 현장에 속속 나타나고 있다.

 

초등학교에선 월말고사가 부활하고 있고 중학교에서는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이 부활했다. 또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부터 거의 모든 학생들이 강제로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을 해야 한다. 모든 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는 학교들이 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학생들은 "말이 보충수업이지, 정규수업의 연장이고 말이 야간자율학습이지 '야간강제학습'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린다. 이런 현상은 아이들에게 방학조차 빼앗아 버렸다. 일부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정규수업 한다고 등록금 내고 보충수업 한다고 보충수업비 따로 낼 거면, 정규수업을 9교시까지 하고 방학도 없애는 편이 낫겠다"고 일갈한다.

 

성적에도 포함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점수가 공개되지도 않는 일제고사에 대한 성적공개가 이 정도의 후폭풍을 가져오는데, 태풍으로 치면 1급 정도 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성적을 공개한다면? 결과 공개가 가지고 올 상황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일제고사보다 더 큰 후폭풍 불러올 수능 성적 공개

 

그런데 19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가 수능성적을 공개하겠다고 발표하고 나섰다. 지난해 9월,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이 '최근 5년간 수험생들의 수능성적을 공개해달라'고 요청한 것을 교과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19일 조전혁 의원실과 교과부에 따르면, 16개 시도 및 230여 개 시군구 단위로 수능성적을 공개하기로 최종 결정했단다.

 

물론 교육당국은 학업성취도 성적 자료와 마찬가지로 개별 수험생 정보와 학교명 등은 일절 밝히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또 조전혁 의원 역시 자료를 연구용으로만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앞서 교육당국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를 절대 서열화 자료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공개된 다음날 180개 시군구 교육청별로 순위가 매겨져 언론에 도배됐다. 누군가에게 공개되는 순간, 정보를 제공한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공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뭔가 새로운 자료를 손에 쥐게 되면 그것을 이용하고 싶은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애초 아무리 좋은 의도로 정보를 가진다고 해도 이것이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정보의 축적과 독점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에게 자료를 공개한다면, 다른 당 다른 의원이 요구할 때도 공개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이 공개를 요구했을 때 제공하였다면 다른 지방자치단체나 교육청에서 요구했을 때 이를 제공하지 않을 논리가 없다.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면서 다른 연구기관이나 교수들이 제공을 요청해도 마찬가지로 제공할 수밖에 없고, 나아가 일반 국민이 국민의 알 권리와 법 앞에 평등을 이야기하며 자료 제공을 요구한다면, 그것도 공개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모든 국민에게 수능 자료를 원천적으로 공개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공개된 수능 성적, 과연 연구용으로만 사용될까

 

'수능시험은 대한민국에서 치러지는 행사 중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가장 큰 행사'라는 농담이 있다. 수능시험 당일 온 국민의 출근시간이 조정되고, 날아가는 비행기도 멈춘다. 수능시험 문제 하나만 잘못돼도 평가원장이 사퇴하고, 교과부 장관이 대국민 사과를 한다. 개인적으론 인생을 좌우한다고 봐도 될 정도로 크게 받아들여지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큰 무게를 가지는 수능성적 공개는 그만큼의 파장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학업성취도평가의 경우 겨우 3~4단계로 공개되지만 수능성적은 0점~500점까지 일렬로 줄 세워져 공개된다. 그 의미와 파장이 같을 수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또다시 강남의 성적이 어떻고, 전라도 섬지방의 성적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보도될 것이다. 이렇게 지역별 학교별 성적 공개를 근거로 하여 다시 대학들과 일부 명문고들은 고교등급제와 평준화 폐지 목소리를 더욱 높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적 공개 파동이 놓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른바 통계학의 패러독스 중 '평균의 함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집단의 평균은 개체의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어떤 집단의 평균 성향이 그렇다고 해서 그 집단에 속해 있는 특정 개체의 성향도 '그렇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A학교 평균 성적이 B학교 평균 성적보다 5점 높다고 해서 A학교 1등 성적이 B학교 1등 성적보다 5점 높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평균은 A학교가 B학교보다 높지만 A학교 1등보다 B학교 1등의 성적이 더 높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이번 수능 시험에서 소위 말하는 전국 수석이 외고나 과학고 같은 특목고 출신이 아니라 일반고에서 나온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수능 성적 공개, 고교등급제 실시로 이어질라

 

지역별 성취도 분포를 그 지역에 속한 개별 학교의 성취도 분포로 환원해서 해석하는 것은 이와 똑같은 오류다. 마찬가지로 학교별 성적 분포를 그 학교의 개별 학생들의 성적 분포로 환원하고자 하는 해석 역시 평균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집단의 평균은 결코 그 집단에 속한 개별 개체의 특성을 말해줄 수 없다.

 

고교등급제는 바로 이런 환원의 오류, 평균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지역별 평균 성적의 차이를 개별 학교의 성적 차이로 환원 해석하고, 학교별 평균 성적의 차이를 개별 학생의 성적 차이로 환원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통계의 해석 오류다. 평균은 개별 학생의 성적이 아니라 그 집단의 특성일 뿐이다. 특히 입시는 학교별 평균 성향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판단이므로 집단의 평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수능성적 공개로 개별 학교를 평가하고, 더 나아가 고교등급제를 실시하여 개별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평균의 함정'이라는 통계학의 패러독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현대판 연좌제의 부활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연좌제가 웬 말인가? 학업성취도평가 성적공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수능성적 공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후폭풍을 가져올 것이므로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태그:#수능성적, #일제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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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육에 관심이 많고 한국 사회와 민족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가끔씩은 세상 사는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글도 써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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