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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의 육해공 3군본부가 모여 있는 국방모범도시 계룡시는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명성이 자자해 역사적으로 봐도 유서가 깊다.

 

특히, 조선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을 도읍지로 정하고 궁궐공사를 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신도내 주초석'이라는 유적지가 있고, 조선태조의 건국 파트너로 유명한 무학대사의 지팡이가 자라서 고목(古木)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괴목정'이라는 공원도 있다.

 

이 이외에도 계룡시에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만큼 용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암용추, 숫용추와 예학의 고장답게 조선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사랑채인 은농재와 신원재, 모원재 등 많은 유적지들이 즐비해 있다.

 

하지만, 수많은 유적 가운데 유독 선사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지난 2005년 10월부터 다음해인 2006년 1월까지 충청남도 역사 문화연구원이 지방산업단지 조성부지로 선정되어 있던 계룡시 두마면 입암리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던 중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등이 발굴돼 계룡시가 유적공원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조선시대 유구 74기 발견

 

▲ 계룡 입암리 유적공원 계룡시의 초입인 계룡IC 부근에 조성중인 입암산업단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던 중 발견된 입암 유적공원.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 김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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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도가 넘는 한낮 기온을 보인 17일, 산업단지 내에 입주가 확정된 업체들의 공사가 한창인 계룡 입암산업단지 내에 위치하고 있는 '입암리 유적공원'을 찾았다.

 

입암산업단지 내에 조성된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쉽게 눈에 띄는 유적공원에 도착해서 보니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깔끔하게 조성된 이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은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작은 주차장 하나 눈에 띄지 않아 결국에는 찝찝하긴 했지만 도로가에 차를 주차해 놓고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유적공원을 설명하는 안내간판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청동기시대~조선시대'까지의 유적이 있다는 안내간판에는 '계룡 입암리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계룡 입암리 유적은 지방산업단지 조성과정에서 확인되어 발굴 조사된 유적이다. 유적은 해발고도 110~120m 내외의 남북으로 뻗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인접하여 왕대천이 흐르고 있다.

 

발굴조사는 2005년 10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조사결과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21기, 수혈유구 등 7기, 백제시대의 주거지 26기, 수혈유구 12기, 조선시대 기와가마 2기 등 모두 74기의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유물은 다수의 토기를 비롯하여 유구석부, 어망추, 석축,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각 시대별 유구의 특징을 살펴보면,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이 방형(팔각방형), 원형의 형태이며, 청동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송국리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주거지는 금강 지류의 청동기시대 취락의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백제시대 주거지는 (장)방형으로 대부분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으며, 선반 및 벽체시설이 일부 주거지에서 확인된다. 이들 주거지는 취락을 형성하여 분포하고 있으며, 4~5세기 백제시대의 주거지 및 토기편년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계룡 입암리 유적은 금강 지류인 왕대천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으며, 이후 계속하여 생활터전으로 활용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입암리 유적은 각 시대별 생활문화의 특징과 생활환경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

 

자세한 설명을 읽은 뒤 본격적으로 유적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제일 먼저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동기시대 우리 조상들의 생활모습은 어떠했을까? 많은 궁금증을 갖고 첫 번째로 찾은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모습은 마치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이 사는 것처럼 둥글게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짚으로 엮은 지붕을 얹어 만든 모양을 하고 있었다.

 

둥근 모양을 띤 내부의 방 중간에는 두 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모양을 띠고 있으며 안에는 별다른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입구를 나무로 막아 놓아서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대충 내부 모습이 추측이 갔다.

 

 

'주거지 48호'라고 되어 있는 이 청동기시대의 주거시설에 대해서 안내간판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구릉 동사면의 북쪽 상단부에 위치한 타원형의 송국리형 주거지이며, 바닥규모는 남북길이 421cm, 동서너비 381cm, 최대깊이 44cm이다.

 

주거지 내부시설로는 타원형 구덩이가 조사되었는데, 내부에 중심 기둥구멍 2개와 외부에 1개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타원형 구덩이의 규모는 동서 78cm, 남북 26cm, 최대깊이 8cm이다. 주거지 바닥면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내부 퇴적토에서 무문토기 몸체부분 및 홍도 바닥부분이 출토되었으며, 석검편·석재 등이 수습되었다.」

 

 

같은 모양의 청동기시대 주거지 4동을 지나면 청동기시대 주거지 43호와 백제시대 주거지 44호라는 머릿돌이 있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은 주거지로 확인된 부분을 마치 묘(墓)와 같은 모습으로 표시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백제시대 주거지는 부뚜막도 있고 내부도 더 넓게

 

 

이곳을 지나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청동기시대 주거지와는 많이 발전한 것처럼 보이는 주거지가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백제시대 주거지의 모습이다. 집의 출입구를 보지 않고 옆에서만 보면 마치 조선시대 초가집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잘 재현되어 있다.

 

이 중에서 백제시대 주거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주거지 31호는 바닥규모가 남북으로 538cm에 이르며 동서로도 422cm, 최대 깊이는 40cm, 면적은 22.7㎡에 이르는 규모로 성인남자 대여섯명이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특징이며, 특히 이 집의 내부에는 불을 지펴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화덕(부뚜막)이 있고, 여러 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어 제법 튼튼해 보인다.

 

 

또한,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개의 토기도 재현되어 있어 그 시대의 생활상을 추측해 볼 수도 있어 아이들과 함께 오면 좋은 역사공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거지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백제시대 주거지를 설명하고 있다.

 

「구릉 동사면의 중단부에 위치하며, 바닥규모는 남북길이 538cm, 동서너비 422cm, 최대깊이 40cm, 면적은 22.7㎡이다. 형태는 방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 방향이다.

 

주거지의 내부시설로는 부뚜막과 다수의 기둥구멍이 확인되었다. 부뚜막은 북벽에 설치되어 있으며, 규모는 아궁이를 기준으로 하여 남북길이 84cm, 동서너비 99cm, 최대높이는 13cm이다. 부뚜막은 점토식이며, 솥걸이는 1개이고, 연소부에서 지각이 2개 확인되었다.

 

기둥구멍은 총 33개가 확인되었는데, 크기상 주기둥구멍과 보조기둥구멍으로 분류되지만 각 기둥간의 특별한 규칙성은 파악되지 않으며, 소형의 경우 주로 벽면에 인접하여 확인된다. 주거지 바닥면은 생토연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로는 연질의 윈저호와 우각형파수 등이 있다.」

 

유적지 조성 잘 해놓고 편의시설은 미흡

 

비록 그 규모는 작고 많은 유물이 나온 유적지는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서 우리 조상들의 주거지를 보고 유물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공원 내에는 벤치와 수도가 잘 설치가 되어 있어 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꼭 있어야 될 것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바로 주차장이다. 지금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적공원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공원을 찾는 시민들을 위해 주차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나중에 산업단지가 활성화돼서 도로에 차량출입이 많아지게 되면 지금과 같은 도로주차는 위험하게 될 것이 뻔하다.

 

작은 주차공간이라도 마련해 주면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 마음 편하게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관람객이 늘어난다면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해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유적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입암리 유적공원에서 발굴돼 현재 복원된 주거지 이외의 조선시대 기와가마와 토기, 유구석부, 어망추, 철기류 등의 유물 등은 발굴조사를 담당했던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으로 옮겨져 보존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가려내 박물관으로 보낸 것으로 계룡시 문화재 담당은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입암 유적공원, #청동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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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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