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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에서 택시 타기

오토바이와 자동차와 사람이 한데 얽힌 그곳
▲ 복잡한 호치민 거리 오토바이와 자동차와 사람이 한데 얽힌 그곳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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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호치민 탄손나트(Tan Son Nhat) 공항 도착. 창밖으로 보이는 호치민의 밤은 우리네와 다를 바 없었지만 기내를 나와 공항으로 들어서자 그 공기부터가 한국과 매우 달랐다. 춥고 건조했던 한국과 달리 덥고 끈적끈적한 호치민의 공기. 3년 전 태국에서 겪었던 비슷한 경험이 떠올랐다.

외국에 나가면 으레 그렇듯이 인천에서 출발할 때는 대부분 한국 사람인 것 같더니만 호치민에 내려 수속을 밟으려 하니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낯선 환경에서 무뚝뚝한 표정의 담당자를 지나치려 하니 그 긴장감에 내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게다.

게다가 베트남은 어쨌든 아직 사회주의 국가 아닌가. 중국 공안을 떠올리게 하는 공항 직원들의 유니폼은 나를 더욱 주눅들게 만들었다. 어느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과 표정을 살피는 나. 생존본능이려니.

호치민의 입국심사대는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외국인용, 그리고 나머지는 ASEAN 국민용이었다. ASEAN이라. 말로만 듣던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었다. 다양한 문화와 이질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모여 있는, 그래서 덕분에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위상을 그만큼 높이고 있는 그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한-중-일이 떠올랐다. 과연 우리는 저들과 같이 동북아시아 국가연합 비슷한 협력체를 만들 수 있을까? 현재 무조건 경제만을 부르짖으며 세 국가가 접근하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다일까? 경제위기와 함께 오히려 극우화되어가는 세 국가의 현실을 떠올리니 오히려 그와 같은 협의체를 만들 수 있었던 동남아 국가들이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짐을 찾은 뒤 공항을 나오니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기는 이들은 택시 기사들이었다. 몇 명의 기사들이 달려들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어디 가느냐고 말을 건넸다. 현재시각 11시. 어차피 공항에서 예약된 호텔까지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그 기사 중 한 명과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호치민 공항에서 호텔까지 약 10달러 정도라는 정보를 이미 한국에서 얻어 온 상태였다.

"30달러!"

택시기사가 아주 터무니없는 액수를 제시했다. 그러더니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무슨 택시 자격증 같은 것의 뒷면을 보여주며 'Airport-Downtown 25~30$'라는 항목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바, 우리는 그의 떠듬거리는 영어를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25달러… 20달러… 15달러!"

결국 그는 15달러, 처음의 반값을 불렀고 우리는 그제야 오케이를 불렀다. 5달러, 한화로 8000원 정도면 바가지 써도 괜찮으려니. 그러나 이틀이 지나 또다시 호텔에서 공항까지 가면서 우리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택시 미터기로 찍은 그 거리는 6~7달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캡도 없던 그 택시를 보고 중국에서 2년 공부했던 아내가 '빵차'일 가능성을 언급한다. 정규 택시가 아니라 일반 승용차를 가지고 하는 불법영업을 빵차라고 한다나? 어쨌든 우리는 위 경험으로 택시를 타려면 택시 운전기사복을 입은 기사를 골라 미터기를 찍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다. 물론 여행 도중 미터기 조작도 당했지만 말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 몇 번이고 기사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역시나 어려운 일이었다. 영어 명사로밖에 이어지는 않는 대화는 금방금방 끊겼고 우리는 서로 겸연쩍은 웃음으로 그 상황을 넘겼다. 그렇게 들은 그의 이야기 중 기억나는 것은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가 하이네켄이라는 사실과 한국인들이 나처럼 호치민을 보기 위해 베트남에 많이 온다는 사실 정도.

호치민의 밤거리

건너기는커녕 걷기조차 조심스러운 그곳
▲ 호치민의 거리 건너기는커녕 걷기조차 조심스러운 그곳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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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보이는 호치민의 밤거리는 매우 복잡했다. 중앙선도 불분명한 도로에 차들과 오토바이가 섞여서 신호등도 무시한 채 제각기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5초마다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 우리의 60~70년대, 4년 전의 중국 단동을 떠올리게 만드는 바로 그 풍경이었다. 아직 교통 시스템이 채 갖춰지지 않은 채 개인의 주행 욕망만이 존재하는 공간.

복잡한 도로에 비해 길가의 상가는 비교적 조용했다. 40여년 전만 해도 되지도않는 영어들이 넘쳐났을 저 곳. 달러를 뿌려대는 미군과 한국군 등을 유혹하기 위해 호치민의 네온사인은 더 반짝였을 것이고 더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호치민 사람들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는 여행 내내 내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호치민이 그려져 있는 사회주의 선전들이었다. 마냥 인자하게 보이는 호치민.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호 할아버지라고 칭한다더니 그들에게 호치민은 할아버지의 형상으로 기억되는 것일까? 뭐, 나중에는 그들이 호치민을 호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거리의 풍경을 통해서도 호치민이란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인식할 수 있었다. 베트남을 현재의 베트남이 되게 했던 호치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자연스럽게 북한의 김일성이 떠올랐다. 과거 우리들은 남북한과 남북 베트남, 김일성과 호치민, 이승만 등을 비교하지 않았던가. 비록 우리는 폄훼하지만 김일성은 분명 북한 인민들에게 호치민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민족주의자로서,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한 정치인으로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존경을 받고 있을 것이다. 물론 호치민과 달리 통일에 실패했고, 세습정권을 만들어냈고, 전 민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그는 분명 북한이 북한다울 수 있게 만든 인물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호치민을 이용한 사회주의 선전
▲ 그들의 영웅 호치민 호치민을 이용한 사회주의 선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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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호치민 흠숭은 십분 이해하면서도 북한의 김일성 경배는 잘못된 신격화라고? 그것은 어쩌면 한반도 냉전체제 하에서 길들여진 우리들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김일성으로서 북한과 남한에 다른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각과는 별개로 북한 인민들이 느끼는 김일성의 존재감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설마 김일성 장군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을 북한 사람들이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겠는가. 그만큼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뜻이리라.

이후 나의 베트남-북한 비교는 여행 동안 계속 이어졌다. 어쩌겠는가. 배운 게 도둑질인 걸.  

베트남 속 프랑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위험하고 복잡한 공간을 요리조리 피해 다닌 택시는 이윽고 사이공 강변 옆의 고전적인 건물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1925년 식민지시대 프랑스가 지었다는 호텔이었다. 물론 그동안 수많은 부침을 겪었겠지만 소위 콜로니얼 양식으로 지어진 호텔은 프랑스와 베트남의 멋을 동시에 한껏 풍기고 있었다.

분명 베트남사에 있어서 프랑스 식민지 시대는 치욕스러운 역사일 텐데 일제의 건물이면 무조건 부수고 보는 우리들과 달리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프랑스의 건물을 그냥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베트남에게 있어 프랑스는 중국이나 우리에게 일본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우리가 묶은 호치민의 역사
▲ 프랑스 식민시대에 지어진 호텔 우리가 묶은 호치민의 역사
ⓒ 마제스틱 호텔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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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베트남 여행 내내 나를 궁금하게 했고 나는 베트남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나 이를 물어봤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프랑스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이 소위 '쿨' 했던 것이다. 프랑스 역시 그 당시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나.

우리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만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베트남 사람들의 프랑스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예상하고 있던 내게 위 대답은 매우 놀랄 일이였다. 물론 내가 만난 이들이 베트남 전체 의견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아무 거리낌 없이 프랑스식 건축양식을 갖다 쓰고, 자신들의 언어를 프랑스의 알파벳으로 표현하는 것 등을 보면 분명 그들의 프랑스는 우리의 일본과 다른 것 같았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식민지 시절 프랑스가 일본처럼 악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창씨개명을 하고 강제징집을 하고 한반도의 자원을 몽땅 뺏어가려 했던 일본에 비해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은 부드러웠던 것일까?

아직까지 같은 자리에서 호치민을 대표하고 있는 호텔
▲ 호텔의 야경 아직까지 같은 자리에서 호치민을 대표하고 있는 호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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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자신감 때문인 듯 보였다. 과거 한국군 참전에 대해 사과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베트남 총리가 승전국인 자신들이 사과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바로 그 자신감.

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프랑스가 과거 식민지 시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오려하자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전투를 통해 프랑스를 쫓아낸 베트남 사람들. 과거 몽고의 침략도 분연히 이겨내고, 프랑스를 거쳐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의 싸움에서도 이긴 그들이기에 침략자의 문화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것이리라.

반면 겉으로만 반일을 외치는 우리들. 현재 우리 사회는 공공연히 외치는 '반일' 구호와 얼마나 표리부동한가. 독도 문제 등만 나오면 양은냄비처럼 달아오르고, 구 중앙청과 시청 건물만 철거하면 그것만으로 '반일'인 냥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시스템은 물론 사회 기득권 역시 아직 일제 강점기 그대로이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의 과도한 감정적인 반일은 냉전체제 하에서 그 헤게모니를 유지하고자 했던 권력층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담론인지도 모른다.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서니 탁자 위에 열대과일이 놓여 있었다. 그제야 실감나는 남국 여행. 그렇다. 이곳은 지금 적도와 가까운 베트남 호치민이다. 우리는 빛나는 호치민의 아침을 그리며 그렇게 잠자리에 들었다.

남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열대과일 남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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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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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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