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례1. 지난 10일 정아무개(29)씨가 한강 서강대교 인근 밤섬 모래사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199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휴학생. 경찰에 따르면, 정씨의 자살 이유는 의외로 '생활고 비관'이었다.

정씨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2006년 학교를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인 전남 담양으로 내려갔다가 취직을 위해 서울로 다시 돌아왔지만, 최종학력이 '고졸'인 그에게 취업문턱은 더 높았다.

고시원비도 내지 못하던 지난 1월 그는 방을 청소한 뒤 연락을 끊었고, 가족은 지난 1월 31일 성북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냈지만 아들을 구할 수는 없었다.

#사례2. 지난 7일 인터넷카페 '백수회관' 익명게시판에는 자살을 예고하는 글이 떴다.
죽을 결심을 하고 약까지 먹었지만 살아났다는 이 회원은 "자살이란 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장기라도 팔까 하는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일자리를 구해도 면접을 봐도 가야할 곳도 오라는 곳도 없다"면서 "사기를 당해 몇 천만원 빚이 생겼고 돈을 못내 전화도 끊기고 다음주에는 월세방에서 쫓겨나게 됐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는 자살을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글이 올라온 직후 수소문 끝에 당사자를 만나본 카페 운영자 주덕한 전국백수연대 대표에 따르면, 이 회원은 34세의 여성으로 간호조무사로 일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1년 넘게 실업상태라고 한다.

주 대표가 찾아갔을 때 그는 밥값조차 없어 이틀째 굶고 있었다. 지금은 주 대표 등의 주선으로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열린여성센터·신용회복기금 등에서 상담을 받으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등록금을 못내서 대학을 중퇴하고 취업도 되지 않아 고민하던 한 대학중퇴생이 지난 9일 한강에서 숨진채 발견된 가운데, '등록금 대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전국네트워크'(등록금넷)와 고려대 학생회는 13일 오전 고인이 다녔던 고려대 학생회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내놓는 대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등록금 인하를 위한 추경예산 편성을 촉구했다.
 등록금을 못내서 대학을 중퇴하고 취업도 되지 않아 고민하던 한 대학중퇴생이 지난 9일 한강에서 숨진채 발견된 가운데, '등록금 대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전국네트워크'(등록금넷)와 고려대 학생회는 13일 오전 고인이 다녔던 고려대 학생회관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내놓는 대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등록금 인하를 위한 추경예산 편성을 촉구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경제위기나 공황이 시작되고 6개월에서 1년이 지나면 자살률이 올라간다는 것이 학계 통설. 장기 실업은 만성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상황을 보면 한국은 이미 불안사회에 들어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유독 한국의 자살률은 높다. 지난해 발표된 한국의 자살률(2007년 통계)은 10만명당 24.8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자살은 20~30대 청년층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해 충격을 줬다. 청년층 전체 사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38.6%(20대), 25.8%(30대)나 된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실업을 비관한 청년층 자살이 줄을 이었다. 지난해 10월 전남 전주시의 대학생 민아무개(22)씨, 지난 1월 대전 복수동의 김아무개(25)씨, 지난 2월 부산 남구 김아무개(26)씨는 계속된 취업 실패로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문화 콘텐츠나 사회적 신드롬에 대해서도 "위기의 징후"라는 분석이 나왔다.

심리학자인 심영섭 영상응용연구소장에 따르면 영화 <워낭소리>,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이나 김수환 추기경 선종에 쏠린 국민적 관심은 심리치유를 바라는 '불안감'의 표현이다. 반면 자본주의 성공 판타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흥행은 암울한 현실을 잊고 싶은 '회피'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비정규 노동자들, 정신건강은 물론 신체건강도 좋지 않다"
 
이영문(아주대 의대 교수) 수원시자살방지센터장은 "'불안'을 의학적으로 보면 세포가 예민해진 상태인데, 외부 자극이 영향을 크게 끼친다"고 설명했다. 예민해진 세포는 처음에 외부자극을 이겨내려고 저항하지만, 자극의 강도가 계속 세져 한계상황에 이르면 고통을 인지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은 "실업상태는 물론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일상적인 고용불안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린다, 정규직과 비교해서 정신건강은 물론이고 신체건강도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꽃보다 남자> 한 장면. 현실에선 재벌 2세가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극히 적다. 남녀주인공인 구준표(이민호)와 금잔디(구혜선)
 <꽃보다 남자> 한 장면. 현실에선 재벌 2세가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극히 적다. 남녀주인공인 구준표(이민호)와 금잔디(구혜선)
ⓒ KBS

관련사진보기


심영섭 소장은 "최근 경제위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졌다거나 가정불화가 생겼다는 상담자가 많이 늘었다"고 전하면서, '인간욕구 5단계설' 이론으로 현 상황을 해석했다.

메슬로우의 유명한 이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 욕구가 해결되어야 다른 욕구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중 1단계가 생리적 욕구, 2단계가 안전의 욕구, 3단계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인데, 고용불안은 이 같은 기본욕구를 흔든다는 것이 심 소장의 설명이다. 존경(4단계)이나 자아실현(5단계)의 욕구는 아예 멈춘다.

또한 심 소장은 '불안'과 함께 '상실감'이라는 키워드로 현 상황을 풀어냈다. 성실하게 일하거나 공부했지만 보상받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그동안 했던 노력이 부질없다"는 상실감과 "나는 누구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설명이다.

우울증이 한국의 실업률을 낮춘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경쟁 이데올로기가 실업자의 심리적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든다는 것. 취업에 실패한 사람을 '무능력자'로 낙인찍기 때문에 우울증은 더 깊어진다. 여기에 사회 양극화가 개인의 상실감을 더 심화시킨다.

이 센터장은 "부족한 사회안전망, 무자비한 공권력, 무분별한 개발 등이 모두 개인을 억누르는 사회적 압력이다"고 해석했다. 심영섭 소장은 "지금 사회에 나가는 대학생들은 80만원대 월급을 받는데 이번에도 부동산 부자들은 양도세 인하로 몇 천만원을 감세받게 됐다, 상실감을 안 느낄 수 있겠나"고 반문했다.

이상윤 정책국장은 "한국의 실업자들은 자신을 탓하면서 극단적으로는 자살을 하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발적인 포기 상태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한국 사회의 실업률이 실제보다 낮게 나오는 것도 취업 의지마저 잃어버린 '구직단념자'가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국장은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일자리는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노동의 권리를 배우기 때문에 인식이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6년 프랑스 청년실업자와 대학생 300여만명이 노동유연화를 기조로 한 '최초고용계약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것도 '실업은 국가적 책임'이라는 국민적 합의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지난 2006년 3월 프랑스 학생들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최초고용계약법(CPE)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거리에 나온 시위자는 300만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 2006년 3월 프랑스 학생들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최초고용계약법(CPE)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당시 거리에 나온 시위자는 300만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됐다.
ⓒ 로이터=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사회안전망, 이제 정신건강까지 챙겨라

경제위기 상황에서 실업자들은 어떻게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일단 주변 사람들의 지지체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이상윤 국장은 "주변에서 멘토를 만들어서 1주일에 한 번씩 연락한다든지 하면서, 실업 당사자에게 계속 관심을 갖고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울증이 더 심해질 경우 심층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

이영문 센터장은 "재활보다 예방의 차원에서 정신건강을 보살피는 사회안전망이 조기 도입되어야 한다"면서 EAP제도나 학생상담의 의무화를 제안했다.

EAP(Employee Assistance Program, 근로자지원프로그램)는 전문가를 통해 조직구성원의 직장생활은 물론, 가정·스트레스 등의 문제를 관리하는 제도로, 외국에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선 생소한 프로그램이다.

그렇다고 실업자를 '예비자살자'로 봐서는 안 된다. 사회적 압력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미리 병을 예단하는 것도 편견이라는 지적이다. 이 센터장은 "실업 중에 오히려 재충전하는 사람도 있으니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태그:#실업, #자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