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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여 년 전, 영국의 평론가 데 만드빌은 새로운 상업시대의 정신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로 요약했다. "사적 이익의 추구는 공공의 이익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이기주의는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공공의 이익을 증진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드빌이 옳았는지도 모른다. 애덤 스미스 이후 경제학자들은 이 말을 두고 결론을 보지 못한 채 계속 논쟁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의 옳고 그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그런 신념 아래 만들어진 사회는 오래도록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훌륭하고 도덕적이며 지속적인 사회에서의 공공의 이익은 항상 개인의 미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도층도 만드빌의 개념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대로 모든 지도층은 공공의 이익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결정한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명제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이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근거다.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첫 번째 의무다.
- 피터 드러커, <경영의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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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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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생전에 기업가 정신이 가장 왕성한 나라가 어디냐는 질문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언론 매체(주로 보수 성향의 일간지와 경제지)에 그의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최근 경제위기 극복을 독려하는 일간지와 경제지들의 기사 속에 그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개 그런 기사들은 공통적으로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왜 하필 기업가 정신일까? 물론 기업가 정신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보수 성향의 일간지와 경제지가 한 목소리로 기업가 정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급한 대로 인터넷에서 기업가 정신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았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기업가 고유의 가치관 내지는 기업가적 태도를 말한다. 특히 기업 활동에서 계속적으로 혁신하여 나가려고 하며 사업 기회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조직하고, 실행하고, 위험을 감수하려고 한다. 또한 조직과 시간 관리 능력, 인내력, 풍부한 창의성, 도덕성, 목표설정 능력, 적절한 모험심, 유머감각, 정보를 다루는 능력,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 구상 능력,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창조성, 의사결정 능력, 도전 정신 등이 요구된다. - 매경인터넷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보수 성향의 일간지와 경제지들이 한 목소리로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속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업가 정신이란 말 속에 함축된 의미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기업가 정신이란 무얼 의미할까? 질문을 바꿔서, 지난 10년 동안 그들의 주장대로 기업가 정신이 위축되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기업가 정신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의 기업가 정신과 일치하긴 할까?

흔히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동력(動力)은 인간의 '이기심'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탐욕과 이기주의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신자유주의가 파탄 상태에 직면한 지금 인류의 미래를 맹목적 이기심에 내맡길 수 없다는 공감대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위에 인용한 피터 드러커의 글 속에도 '인간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공공의 이익을 증진한다'는 자본주의 신화를 회의적인 눈길로 응시하는 노대가의 깊은 시름이 한숨처럼 배어 있다. 그러나 보수 성향의 일간지와 경제지들은 그의 인간적 고뇌를 애써 외면한 채 그들이 맹신하는 자본주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한 권위와 근거로 피터 드러커의 이름을 내세울 때가 많다.

만약 피터 드러커에게 직접 바람직한 기업가 정신을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어쩌면 오늘 인용한 글이 그의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런 신념(사적 이익의 추구는 공공의 이익으로 귀결된다) 아래 만들어진 사회는 오래도록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훌륭하고 도덕적이며 지속적인 사회에서의 공공의 이익은 항상 개인의 미덕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목은 한국 사회의 지도층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다.

그의 말대로 "모든 지도층은 공공의 이익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결정한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명제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람들이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근거다.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첫 번째 의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공익을 사익보다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사회의 지도층이 자신이 속하는 집단의 이익을 공익에 종속시키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는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얼핏 보면 앞서 했던 얘기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짚어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사회의 지도층이 자신이 속하는 집단의 이익을 공익에 종속시키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경영자는 공익과 자신의 이익이 일치하도록 만들어서 일반 대중과 개인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가 아닌 이상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공익에 종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익을 희생한다면 그런 사회가 오래 지속될 리 없다. 결국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최상의 선택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공익과 사익의 균형과 조화를 외면하는 기업가 정신은 올바른 기업가 정신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보수 성향의 일간지와 경제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 기업가 정신이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외면한 채 사익 추구에만 몰두하는 거라면 그것은 교육에서의 '경쟁력 강화'나 제2롯데월드 사태에서 드러난 이율배반적인 '안보' 타령, 전가의 보도처럼 어디에나 갖다 붙이는 '빨갱이(좌파)' 타령처럼 사익을 공익으로 포장 또는 위장하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의 지도층이 피터 드러커를 진심으로 존경한다면 먼저 그가 말한 기업가 정신의 참된 의미부터 깨달아야 할 것이다.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무분별한 민영화 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을 기업가 정신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피터 드러커의 책을 꺼내어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 피터 드러커, <경영의 실제>(한국경제신문, 2006, 이재규 譯)



경영의 실제

피터 드러커 지음, 이재규 옮김, 한국경제신문(2006)


태그:#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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