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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흐르는 은하수 마을을 찾아서

 

 

미리내는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있다. 이곳을 가려면 안성 시내에서 쌍령산 골짜기로 들어가야 한다. 미산 저수지를 왼쪽으로 끼고 북쪽으로 가면 골짜기 끝에 미리내 성지가 나타난다. 미리내는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신자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밭을 일구고 옹기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미리내는 병오박해(1846)때 순교한 김대건(1821-1846)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이곳은 현재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경당이 있는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이다. 미리내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교우촌이 폐쇄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박해 후 바로 교우촌이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들 천주교 교우들은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미산천 주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미사를 드렸다. 이때 집에서 흘러나오는 호롱불빛이 맑은 시냇물에 보석처럼 비추어 그것이 마치 은하수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은하수의 순 우리말인 미리내라 불렀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눈이 내려 미리내 가는 길은 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산도 들도 집도 모두 하얀 눈을 뒤집어썼다. 대지를 뒤덮은 하얀 눈이 미리내라는 마을 이름과 정말 잘 어울린다. 미리내 성지에 도착한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성 요셉 성당으로 간다. 성 요셉 성당은 미리내 초대 주임신부인 강도영 마르꼬(1860-1929) 신부가 1906년 신자들과 함께 건립한 본당이다.

 

미산골프장 승인도 취소하게 하는 힘

 

 

성 요셉 성당은 미리내 본당이다. 이곳의 제대에는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싶어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문의 손잡이에 '미산골프장 반대 집회 참가로 미사 없습니다'라는 쪽지가 붙어 있다. 미산골프장이 뭔데 미사도 거를까 의아해 하면서도 종교가 생명과 환경운동에 적극적이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날 미리내 성지 주임신부인 강정근 마티아 신부는 수원의 경기도청 정문 앞 비닐천막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경기도는 미산골프장 승인을 취소했고, 강 신부는 49일만에 농성을 풀 수 있었다. 그 바람에 강 신부는 오히려 유명해졌다. 농성하는 신부로.

 

이를 통해 미리내 성지는 깨끗한 환경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별러서 이곳을 찾은 우리들은 성인이 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볼 수 없어서 정말 유감스러웠다. 우리는 그 대신 성당을 한 바퀴 돌면서 성당의 100년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종각에는 1917년 들여 온 종이 걸려있고, 성당 옆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 있다.

 

성당 옆으로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신자의 자녀들이 다니던 해성학원 교사(校舍)가 남아있다. 슬레이트 지붕의 두 칸 건물로 보이는데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다. 성당 위쪽으로는 16위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그곳은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는 성당을 내려와 순교자 기념성전과 김대건 신부의 무덤이 있는 경당으로 향한다.

 

자연과 안 어울리는 순교자 기념성전

 

 

성지 입구에서 묵주 기도의 길과 십자가의 길을 따라 왼쪽으로 가면 웅장한 건물이 앞에 나타난다. 1987년에 축성해 1991년에 봉헌된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전'이다. 성당과 종탑의 2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당 건축이 지나치게 크고 특이해서 자연과 잘 안 어울린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성당이 넓은 게 편안한 마음이 든다. 성당 제대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유해 중 종아리뼈가 안치되어 있다. 종아리뼈가 말라서 굉장히 가늘어졌다. 제대 뒤로는 고딕 양식의 창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제대와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박해시대 천주교인들을 고문하던 형구와 고문 모형물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의 것은 주리를 트는 모습인데 하나는 가위주리라고 해서 무릎에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팔주리라고 해서 팔과 어깨에 고통을 가하는 장면이다. 2층을 지나 3층 합창대에 올라가 보니 뒤로 예수가 승천하는 모습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성당과 제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경당과 그 앞에 모셔진 네 신부 이야기

 

 

기념 성전을 나와 우리는 왼쪽에 십자가의 길을 따라 경당으로 향한다. 경당(經堂)은 경배와 기도 그리고 예배를 행하는 작은 성당을 말한다. 이 경당의 공식 명칭은 '순교자의 모후께 봉헌된 79위 복자 시복 기념경당'이다. 1925년 7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복자가 되었고 1928년 9월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기념경당 봉헌식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경당을 '순교자의 모후 경당'이라고 줄여 부른다.

 

경당 안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중 발 뼈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하고 있다. 제대 위에는 종탑 모양의 구조물에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고 제대 뒤 창문은 고딕 양식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흰색 바탕에 붉은 색 장식이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종교적 경건함 외에 건축적 단순미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경당 밖에는 이곳 미리내 성지와 인연이 있는 네 분 신부님의 무덤이 마련되어 있다. 그들 네 분이 1846년 이곳에 묻힌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1853년 이곳에 묻힌 조선 4대 교구장 요한 페레올 주교, 1929년 이곳에 묻힌 초대 미리내 성당 주임신부 강도영 마르꼬, 1952년 이곳에 묻힌 3대 미리내 성당 주임신부 최문식 베드로이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다. 그는 1836년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937년 마카오 신학교로 갔다. 1842년 요한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사목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중국과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며 포교를 했다. 그는 1845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846년 5월 서해 백령도에서 체포되어 9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7월 스승과 동료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옥중 서신을 보낸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히 (이를)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여! 잘 있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강도영 마르꼬 신부는 현재의 미리내 성지가 있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신부이다. 1896년 4월 미리내 성지에 본당이 생긴다. 그리고 한국인 신부로는 세 번째 서품을 받은 강도영 마르꼬 신부가 부임한다. 그는 1906년 성 요셉 성당을 봉헌하고 본당 교우수를 1600명으로 늘린다. 1907년에는 해성학원은 물론이고 해성 제사공장을 설립한다. 그는 1925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복자로 시복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으며 1928년에는 순교자의 모후 경당을 봉헌하였다. 강도영 마르꼬 신부는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1929년 선종했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곁에 묻혔다.    

 

머리와 시신을 찾아 걸어서 이곳까지

 

 

이들 네 신부의 묘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울술라의 묘가 있다. 1864년 이곳에 모셔졌으며, 묘는 한국식의 봉분 형태를 하고 있다. 묘 옆에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 보니 1798년 장흥 고씨 가문에서 태어나 김대건 신부의 부친인 김제준에게 시집을 와 1821년 김대건 신부를 낳았다.

그리고 고 울술라 여사 왼쪽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 미리내까지 모시고 와 안장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의 무덤이 있다. 그는 1846년 10월26일 몇몇 신자들과 함께 새남터 백사장을 찾아 순교한 김 신부의 머리와 시신을 지고 이틀 밤을 걸어 자신의 선산이 있는 이곳 미리내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는 10월 30일 이곳에 김 신부의 시신을 묻어 영혼의 안식을 취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후 중국과 일본에 가 공부하며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인 안성과 용인 땅으로 돌아와 평생을 살았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건강해서인지 92세까지 장수했으며,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김대건 성인의 곁에서 영원의 안식을 취하고 있다. 그의 묘 옆에는 1970년 후학들이 세운 '함평이공 민식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미리내 성지#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성 요셉 성당#순교자 기념성전#순교자의 모후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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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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