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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일(1월 8일)

히말라야 발자국
15 : 00   팡보체(PANGBOCHE, 3989m) 17 : 30   페리체(PHERICHE, 4280m)

떠남 자체가 목적이었다

팡보체(3989m)에 도착해 마중 나온 나란을 따라 음식을 주문해 놓은 티하우스로 따라갔다. 들어가 보니, 전문적인 티하우스가 아니라 일반 가정집 2층이었다. 1층은 우리나라의 외양간처럼 바닥에 건초를 깔아 놓은 곳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나이 지긋하고 인자해 보이는 할머니가 우리를 달갑게 맞아주었다. 할머니의 밝은 표정에 괘씸한 생각을 해 본다. 할머니에게 '나는 사람일까? 돈일까?' 내가 생각해도 난 참 '못난 놈'이다.

내부를 티하우스처럼 꾸며 놓긴 하였으나, 주방겸 숙소로 쓰는 공간인 듯 주위에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과 가재도구가 보인다. 그곳에서 본 4살의 소녀는 선글라스를 쓴 나의 모습이 신기한 듯, 자신의 조그만 가방에서 각양각색의 선글라스를 꺼내 패션쇼를 시작한다. 양쪽 볼이 빨갛게 동상에 걸려 능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 피부 위로 말똥거리는 눈에서 투명하고 순진한 생명의 빛이 발한다.

예쁜 모습에 사진을 찍어주니 확인해 보겠다며 디카를 수줍게 들여다본다. 이 무명의 티하우스에서 맛 본 레몬차(hot lemon)와 감자의 맛은 그동안 네팔에서 먹은 어떤 음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네팔 가족의 향이 묻어 나는 음식이어서 그럴까? 좋은 이웃을 방문한 듯 발걸음이 가볍다. '다음에는 우리 집에 초대할게요!' 떠나는 발걸음 뒤로 할머니와 아이의 미소가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히말라야 산악마을의 가정에서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은은한 삶의 감동이 되어 가슴에 무젖는다.

양쪽 볼이 동상에 걸려 능금빛을 띠고 있었다.
▲ 무명의 롯지에서 만난 순백의 히말라야 소녀 양쪽 볼이 동상에 걸려 능금빛을 띠고 있었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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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하우스에 들어갈 때는 산 5부 능선 이상에만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 길을 나설 땐 길조차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안개가 세상을 숨막히게 밀봉하고 있었다. 소마레 마을을 거쳐 페리체 마을 초입의 언덕에 이르자, 조금씩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오후 5시다.

세상을 숨겨 버린 안개와 어둠 속에서 이런 저런 상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일까? 행복이란? 그리고 삶이란? 떠남의 이유를 다시 묻고 있는 것이었다. 히말라얀 롯지에 도착해 웃는다. 이 여행의 목적은 히말라야도, 설산도, 트레킹도 아닌 '떠남' 그 자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에 짐을 풀며 나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하였다. 또 내 여행의 목적은 한국에서 나올 때 이미 이루어졌음을 말했다. 나란은 내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머지 일정 동안 그 여행의 목적에 아름다운 옷을 입혀 가라며 따뜻한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순다르 개띠?

우리가 페리체(4280m)의 롯지 식당에 들어오니, 이미 난로 주위에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는 두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여자는 나란에게 영어와 네팔어를 섞어 가며 많은 말을 쏟아냈으며, 한 남자는 누가 들어온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난로만 주시하였다.

여자는 나란과 자신의 포터에게 '순다르 개띠?'하며 농을 던진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네팔어로 '예쁜 여자'라 한다. 그녀는 네팔리의 입에서 '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계속 '나 예쁘지?'하며 신이 났다. 나란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조차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우월의 건방과 희롱의 풍경에 불쾌감이 느껴졌다.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는 네팔리들을 매우 권위적이며 거만한 태도로 대했으며, 치켜뜬 눈은 결코 아래를 향하는 법이 없었다.

이국땅에서 반갑게 한국인을 보았다는 생각도 잠시, 그들과 함께 했던 2시간여 동안 '산이란?', '산은 왜 오르는가?' '자연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등을 고민하게 되었다.

네팔 트레킹을 떠나는 친구에게 세 가지를 부탁하고 싶다.

  첫째, 자연에 대한 경건함
  둘째,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
  셋째, 세상과 삶에 대한 겸손함

위 세 가지를 품고 있어야 신발도 가볍고, 몸과 마음도 가벼울 것이다. 그대의 영혼도 가벼워질 것이리라.

순다르 개띠? 무엇을 아름답다 말하고 싶은가? 무엇으로 그 아름다움을 평가받고 싶은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허영과 거만함을 감출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눈가에 스며 있는 사치스러움이 싫다.

칸트와 장자,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자문을 얻기 위해 해당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양 도가철학의 대가인 장자와 독일의 계몽철학자 칸트를 끌어 들여보는 것은 어떨까? 

장자 : 반갑구만. 난 장자라고 하네.
칸트 : 명색이 내가 교수인데, 만나자마자 함부로 반말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도덕을 강조하는 동양의 윤리입니까?

장자 :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군. 내가 워낙 자유분방한 사람이라서. 하지만 난 서양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과 예, 도덕을 떠벌이고 다니는 꺽다리 공자와는 다르네. 도덕 같은 인위적인 것 때문에 자유로운 정신이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지. 그렇다고 자네를 무시한 것은 아니네.

칸트 : 그래요? 제가 쫌 민감한 성격이라서요.
장자 : 자네 얘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사람들이 자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춘다지? 그렇게 사는 것이 답답하지 않은가?

칸트 : 생각의 차이겠지요. 그건 그렇고, 만남을 주선한 인철씨 말에 따르면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서로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하던데요.

장자 : 그래? 이제 좀 말이 통하겠군.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나의 견해를 <장자>에 자세히 기술해 놓았지. 아주 재미난 비유와 우화가 들어 있는 책이니 꼭 읽어보게나.
칸트 :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장자 : 자네 붕(鵬)이라는 새를 아는가?
칸트 : 처음 들어보는 새인데요. 중국에 사는 새입니까?
장자 : 상상 속의 새지! 옛날 크기가 수 킬로미터가 되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새로 변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불렀지.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날개가 하늘을 가득 드리운 구름과 같았지. 한번 바다로 날아가면 수십 킬로의 엄청난 파도가 치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수백 킬로를 올라갔어.  

칸트 : 대단하겠는데요?

장자 : 하지만 땅에 있던 매미와 비둘기는 붕의 모습을 비웃으며 말했지. '우리는 있는 힘껏 날아 올라야 느릅나무와 다목나무에 머무르지만 때로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저 새는 뭐하러 (힘들고 멍청하게) 수백 킬로의 하늘을 힘들게 오르는가?'

칸트 : 그들의 작은 눈으로 보며 그렇게도 볼 수 있겠네요.

장자 : 그래서 난 매미와 비둘기를 비웃으며 말했지. '가까운 곳에 나가는 사람은 세 끼니의 식사만으로 돌아와도 배가 부르지만, 수 킬로를 가는 사람은 하룻밤 걸려 곡식을 찧어야 하고, 수십 킬로를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한다. 어찌 너희들 같은 조그만 날짐승들이 어떻게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을 알랴?'

칸트 : 참 재미있는 우화군요. 대붕의 비상이라? 붕의 날개짓에서 사방으로 확 터지는 자유가 느껴집니다.

장자 : 그렇지. 매미와 비둘기의 모습이 서로 자신이 옳다고 고집부리며 다투고 있는 우리 인간 같지 않은가? 작은 세계에 갇혀 아웅다웅 다투는 소갈머리 없는, 속좁은 인간 말일세. 저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는 붕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어리석어 보이지 않겠나? 어떤 구속도 없이 절대 자유 경지에서 노니는 '붕'에게서 무엇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날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정신적 자유이지. 나는 생명 없는 질서보다 생명 있는 무질서를 좋아하지.

칸트 : 장자님의 말을 들으니, 내가 꼭 '우물안 개구리'처럼 보입니다. 장자님이 붕이 되어 세상을 비웃고 있군요.

장자 : '우물안 개구리'도 내 책에 나오는 이야기일세. 세상의 온갖 차별은 사람들의 상대적인 가치 판단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절대적(도) 입장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네.

칸트 : 그럼, 아름다움과 추함도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놓은 가치일 뿐이겠군요.
장자 : 그렇지. 이해를 잘 하는구만. 역시 교수는 달라. 중국 최고의 미녀였던 모장이나 여희는 사람들이 미인이라 불렀지만, 물고기는 그녀를 보면 물 속 깊이 숨어버리고, 새는 그를 보면 하늘 높이 날아 오르고, 순록을 그를 보면 기운껏 달아나지. 이 넷 중 어느 쪽이 이 세상의 진짜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칸트 :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그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 말이 옳다고 할 수 없겠는데요.

장자 : 그렇지. 나 또한 아름다움을 논하는 자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네. 자신의 판단만이 옳다고 믿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이와 똑같지. 모든 사물은 내가 어떠한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是非)·선과 악(善惡)·미추(美醜)·빈부(貧富)·화복(禍福) 등의 판단이 생기게 되네. 개인의 주관적인 편견에 의해 시시비비를 따지는 다툼과 갈등만이 생길 뿐이야. 상대적인 소견을 가지고 어찌 절대적 진리를 다투는가? 우물안 개구리들이지!

칸트 : 미추의 기준 자체가 인간의 어리석음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진짜 아름다움은 뭐라 할까요? 혹 대자연의 약동하는 생명 속에서 절대 자유를 누리고 있는 붕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장자 : 그것만큼은 아름답다고 말해도 될까? 
칸트 : 전 붕에게서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숭고미'를 찾을 수 있겠네요.

장자 : 아름다움의 너머, '숭고미'라?

칸트 : 네. 먼저 '미'와 '숭고미'를 구분해 볼까요? 미(아름다움)는 그 대상에 한정되지만, 숭고미는 그 대상을 넘어 무한으로 다가옵니다. 미는 직접적인 만족과 쾌감을 주지만, 숭고미는 간접적으로 체험됩니다. 예를 들어, 인철씨가 아마다블람의 멋지고 우아한 모습에 감탄을 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의 영역이지만, 아마다블람을 통해 자연의 거대한 힘과 형언할 수 없는 생명의 약동을 느꼈다면 그것은 '숭고미'의 영역이지요.

장자 : 그렇지. 인철씨는 아마다블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조화로움과 생명력에 주체할 줄 모르는 전율을 느꼈다고 했으니까.

칸트 :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합니다. '밤은 숭고하고 낮은 아름답다. 숭고는 감동시키고, 미는 매혹시킨다.' 우리는 자연의 화려한 모습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또한 그 너머에 있는 자연과 초인간적인 무궁무진한 힘과 크기에서 숭고미를 느끼게 되지요. 그 대상이 공포스럽지 않은데도,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장자 :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가능한 것일까? 사람을 평가할 때 외적으로 표현되는 모습를 통해 '미추(美醜)'를 판단하지만, 자연과 생명의 절대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에게 우린 미추 너머의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고! 

칸트 :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요. 또한 중요한 것은 참된 숭고미의 경우,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숭고미를 느낄 줄 아는 심미안을 계발시켜야 합니다.

장자 : 그럼, 우리 모두 붕(鵬)이 되면 되겠군.
칸트 : 그거 좋지요.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숭고미를 풍기는 사람이 됩시다.

'아름다움'에 대한 장자와 칸트의 대화를 억지로 꾸며 보았다. '순다리 개띠'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다. 아름다움을 확인받으려 하지 말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라고.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미추(美醜)를 판단하지 말고, 절대 자유 경지에서 노니는 붕이 되라고. 붕이 되어 대자연의 숭고미를 느끼며 살라고.

무명의 롯지에서 보았던 히말라야 소녀의 모습이 눈앞에 살아난다. 미추? 아니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따뜻한 눈물이 눈에 고일 정도로... 이것이 숭고미일까?

이럴 때면 친구와 술 한잔 기울이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봐, 붕(朋)! 우리 붕(鵬)이 되자!'

덧붙이는 글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에베레스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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