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말복날의 손수레 9

 

"그럼 식구가 어디 세 들어 사는 거야?"

"예. 하숙집을 하시며 혼자 사시는 큰어머니가 도와주셨어요. 집 뒤쪽에 하숙방으로 내주던 방 두 칸이 있는데 그걸 우리 식구가 쓰고 있어요."

 

"몇 식구지?"

"남동생이 있는데 아직 초등학생이라 아빠, 엄마랑 방을 함께 써요. 제 방은 저랑 문창과 동기인 유리랑 함께 쓰고 있어요. 그 애는 하숙을 하는 거죠. 그러면 큰어머니한테 부담이 조금이라도 덜할 테니까요."

 

"그럼 거실이나 식당은 다른 하숙생들과도 함께 써야겠구나."

"예. 유리만 빼놓고는 다 남자 하숙생들이라 불편한 점이 많아요. 그래도 거리의 노숙자들을 볼 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화가가 되려는 생각을 문학 쪽으로 바꾼 건 재료비 부담 때문일까?"

"예, 그런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인생에서 문학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았어요. 그게 더 큰 이유예요. 문학 작품들은 많은 교훈을 주더라고요."

"그럼 그림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작은 화실을 꾸며놓고 그림을 그릴 생각이에요. 그림은 정말 순수하니까요."

 

"나랑 생각이 비슷하구나. 나도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지. 화실을 꾸며놓고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선생님도 첫 꿈이 화가라고 하셨어요. 강의하실 때 칠판에 그림을 많이 그려주셨어요. 그래서 이해하기가 쉬었어요."

 

"하기야 내가 틈틈이 잡지나 단행본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었지. 중학생 때나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만화가가 되려고 했었어. 그래서 유명 만화가들이 많이 보이는 공동화실에 찾아갔었는데, 그분들은 고스톱을 치고 계시더라구. 그 중 한 분이 그러시는 거야. 만화 말고 다른 예술 할 생각은 없어? 그래서 소설도 생각하고 있다고 했지. 그랬더니 소설가 되는 쪽으로 생각해 보라고 하시더라구. 소설가는 지식인 예술가로 대접을 받는다는 말씀이었어. 노벨문학상도 있으니까 꿈도 원대하게 품을 수 있다고 하시고 말이야.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여러 문학작품들을 대하며 나는 감동을 받았고, 그러다가 문학 속으로 점차 빠져들었던 거지. "      

"예, 선생님."

 

"다른 아이들은 잘 있나 몰라?"

"아, 지혜 기억나시죠? 맨 앞자리에 앉곤 했던."

"그래, 기억나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좀 어른스럽고 글을 잘 썼는데, 지혜는 뭘 전공할까?"

"놀라지 마세요, 후후."

"놀랄 만한 전공이 뭘까?"

"간호학과 다녀요, 후후."

"아, 그렇구나. 천사표 대학생이네, 허허. 그럼 구철이는?"

 

선호는 구철이가 불쑥 떠올랐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특히 기억나는 아이들을 꼽자면 효진이와 지혜, 그리고 구철이었다. 구철이는 집도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혼한 부모 어느 쪽과도 함께 살지 않고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결손가정의 아이이면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남자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받아서 그런지, 틈만 나면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이 주특기였다. 선호가 판서를 할 때 여자아이가 잠시 일어나면 의자를 빼내버려서 교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거나 하는 식으로 심술을 부렸다. 결손가정의 아이인 데다 남자아이들과 잘 어울리기 어려운 외톨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지만, 그렇다고 나무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녀석, 여학생들을 괴롭히면 어떻게 하니?" 하고 나무라면 왜 자기가 잘못했는지를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어느 날은, 학생들에게 생활문 글감으로 '아버지'를 주었더니 구철은 연필도 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를 싫어하기 때문에 쓰기 싫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에 대해서 쓰라고 했더니,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싫어하기 때문에 쓰기 싫다고 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서 쓰라는 건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래서 '할머니'에 대해서 써보라고 했더니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맛있는 걸 많이 사주지 않기 때문에 쓰기 싫다고 했다. 교실 안으로 군것질거리를 들고 들어오는 아이는 구철밖에 없는데도 그랬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고 쓰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쓰라고 했더니 딱 한 사람을 이야기했다. 여자 담임선생님이었다. 구철이에게 두 손 들었다고 얘기하는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한테 자주 혼났을 텐데도 그렇다고 하니 상상 밖이었다. 하여간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말썽을 부리거나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구철. 그렇지만 선호는 구철에게서 감동받은 한 가지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유, 그 말썽꾸러기요? 구철이 소식은 저도 모르겠어요."

 

효진이 자신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2004년 말에 초고를 써놓고 PC 안에 묻어두었던 소설입니다만, 그 시절의 세상 이야기와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덧붙여서 많은 부분 보충하고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선호의 눈을 통해, 가난하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이 소설은 실화가 아니라 서사성 있는 창작입니다. 


태그:#모래마을, #결손가정, #문예창작과, #간호학과, #화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