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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제가 "거긴 몇 명 대학 보냈대? 서울대 간 애는 있어?"라는 기사를 쓴 후 많은 의견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 댓글을 보면서 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안학교 보내는 것이 회피로 보인다, 이 글을 왜 썼냐, 글 쓰신 엄마가 안타깝다, 대안학교에 간다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냐, 등등의 댓글을 보면서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서초구인 이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지적했다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오마이뉴스>에 들어오는 독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한번쯤 다시 내 교육관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 이유는 <오마이뉴스>의 독자층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선생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야, 인마. 행복? 대학은 성적순이야!"

86년 15살의 여중생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그 후로 학교에서 때론 농담으로 때론 진담으로 선생님들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느냐는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대학은 성적순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했었지요. 그러나 그 답은 전혀 엉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고에 좋은 대학과 행복은 같다는 등식이 성립하고 있으니까요.

현실을 바꾸려면 높은 위치에 올라야 한다?

댓글 중에 25살의 젊은 분이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선생님께 왜 수능을 위해서 언어영역 공부를 해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을 때 그 선생님께서 '나도 살아 있는 교육을 하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그런 현실을 위해서 니가 그 위치에 올라가 바꿔라. 그렇지 않다면 현 교육방향을 따라야 하는 게 현실이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지금 현실을 살아 보니 와 닿았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선생님 말씀이 와 닿습니다. 저 역시 입주 위주의 학교 교육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 위치에 올라가서 바꾸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저는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르지 못했지만 저처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는 일은 했습니다. 우린 그들을 386세대라고 부릅니다. 아니 386세대뿐만 아니라 과거 민주화운동에 자신을 헌신했던 사람들이 지금 국회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들이 가서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 모순을 쉽게 극복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극복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다수의 흐름에 묻혀 동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지위에 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다들 모순에 동의를 하고 맙니다.

"이번 교육감 정말 잘 뽑아야 돼요."
"자긴 어차피 대안학교 보내니까 상관 없잖아."  

"내 아이만 행복하면 뭐해요? 우리 나라 교육이란 큰 틀 안에 다 묶여 있데요. 잘못된 교육정책을 바로 잡아야죠."
"말이야 쉽지만…."

사람들이 말끝을 흐를 때, 저는 이해가 안갔습니다. 제가 보수적인 서초구에서 제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낼 때는 그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에게 한 건데도 반응이 신통찮았습니다. 이유가 도대체 뭘까? 왜 교육이 썩었다고, 이대로 가면 큰일난다고 했던 사람들인데 교육감 선거에서는 뒤로 물러날까?

교육감 선거 결과에서 저는 송파, 강남, 서초가 보여준 힘을 보고 더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이 풀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제 자신에게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우리 나라 경제가 나빠지면서 부동산 경기도 안좋아졌고, 더불어 집값이 왕창 떨어졌을 때 제 마음에 순간 '앗 떨어지면 안되는데. 나 빚내서 집 샀는데'였습니다. 집값이 너무 비싸고, 거품이 많다고, 이대로 가면 서민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했던 제가 내 집값 떨어지는 걸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육감 당선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구요? 새로운 것을 바라고, 변혁을 바란다고 하지만 실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은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게 솔직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은 교육이 문제고,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자기 아이들은 바뀌든 안바뀌든 그 소수점에 속하는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꼭 내 아이만큼은 들어가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제 말이 먹힐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또 그 사람들은 이미 물적 토대가 갖춰졌기 때문에 평등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꼭 강남권에만 속하느냐? 그렇지만은 않겠지요. 지금 이 교육제도 안에 있는 부모들은 거의 대부분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학교에서 치러지는 일제고사에서 내 아이 성적이 나오는데 어느 부모가 여유만만하겠습니까. 그 서열에서 낙오되면 인간취급 받기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자신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담임샘으로부터, 또 사회에 나왔을 때 학벌의 서열로부터 충분히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좋은 차가 오늘의 당신을 말해준다?

좋은 차가 오늘의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
 좋은 차가 오늘의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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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광고를 아시나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차로 대답했다는' 이 광고.

저는 이 광고를 보고 몇 년 전 비싼 아파트 광고에서 "저 여자 괜찮네, 몇 호야?"라는 광고를 봤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자신의 삶의 평가 기준이 이런 것이구나. 내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내가 어떤 차를 굴리는지, 이젠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를 넘어서 아이들이 어느 대학을 가는지에 따라 나의 존재가 하늘과 땅을 오가겠구나. 이런 세상의 가치로 평가받은 사람들이 엄친 딸과 엄친 아들로 또 자기 아이들을 잡겠지요. 부정하고 싶지만 우리의 의식은 자본주의의 가치에 따라 움직입니다. 도덕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 현 대통령이 뽑히게 된 이유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현실, 지금 우리가 진리라고 달려가고 있는 가치에 대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비싼 차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자신의 위치를 답해주는 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고, 지향할 삶인가를 되묻고 싶습니다. 제 차는 15년 된 엘란트라 입니다. 범퍼가 떨어져 너덜거립니다. 이 광고에 따르면 저는 40년이 넘도록 가치없는,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잘산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잘산다는 기준이 물질적 소비의 증대입니다. 옷이 남보다 많아야 하고, 차도 많아야 하고, 아파트도 많아야 하고, 땅도 많아야 하고, 어쨌든 뭔가 많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는 이유가 솔직하게 무엇일까요? 공부해서 이웃과 세상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라, 고 말하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공부를 강요하고, 학벌을 강요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많이 소비할 수 있는 사람, 돈 많이 벌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거 아닐까요?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돈으로 환산하면 14조 7천억 원이고, 그 처리비용만도 4천억원에 이른다고 하지요, 그 돈은 서울 상암동 축구장을 70개 이상 지을 수 있는 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년에 그 15조에 가까운 돈을 버릴 수는 있어도 굶어죽는 북한동포에게 정치적이든, 어떤 이유든 쌀을 보낼 수는 없답니다.

내 차의 선풍기
 내 차의 선풍기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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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 에어콘 안돼?"
"선풍기는 돼요."

"요즘 에어콘 안되는 차가 어딨어?, 야 북한동포 도울 돈 있으면 니 차부터 바꿔."

작년 여름 저는 돈만 생기면 북한동포 돕기를 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때 사람들로부터 네 똥차부터 바꾸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저는 죽어가는 생명 살리는 일이 제 차를 바꾸는 것보다 여름 휴가 가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어라 달려간 그 길의 끝이 낭떠러지라면?

정말 여러분께 되묻고 싶습니다. 무엇이 잘사는 것에 기준입니까. 내 동포가 굶어죽어도 버릴 돈은 있어도 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잘사는 걸까요? 물론 저도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편하게 돈벌어서 잘먹고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생각이 든다 하더라도 과연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옳은가는 진지하게 고민할 문제입니다.

왜냐면 누구나 다 달려간다고 그 길이 옳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낭떠러지를 향해 죽어라 경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수학능력시험 등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학생이 매년 200여명에 이르고, 15~19세 청소년 사망원인 중 자살이 교통 사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해서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으로 떠올랐다는 통계청의 조사는 낭떠러지인 줄도 모르고 달려가는 우리에게 이젠 멈추라 합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의 자리에 가서 바꾸라는 말은 역사는 지배권력만이 쓰는 것이라는 무언의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학농민혁명도, 4.19혁명, 80년 5월 광주항쟁, 87년 6월 항쟁도 그 중심은 시민이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잘난 한두 사람이 아니라,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바로 내 자신이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이 나라의 독립운동을 한 건 33인의 선언문을 낭독한 그들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남몰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만약 사회에 모순을 느꼈다면 모순을 느낀 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모순을 깰 마음을 내면 됩니다. 학교 교육이 문제라고 생각한 사람이 문제제기 하면 됩니다. 왜 그걸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야만 해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내 인생을 남에게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교육문제건 사회문제건 핵심은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문제를 푸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생님처럼 높은 사람이 돼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높은 사람이 안 된 사람은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또 높은 사람이 돼서 생각이 바뀌어도 그 문제는 풀 수가 없습니다. 문제를 느끼고, 해결하고자 하는 그 사람. 저는 그 한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은행의 광고물
 어느 은행의 광고물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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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유학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해주시겠습니까?

이 은행에서 말하는 현명한 부모는 이렇게 답합니다.

"널 위해 달러로 매월 적립하고 있어."

여러분은 어떤 부모이신가요?                      
                                                                 
새로운 가치,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건 바로 우리

저는 지금의 몰입식 교육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고, 좋은 대학 가서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 가르치지 않는 학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남에게 나누라고 하기 이전에 자신의 것을 먼저 나누라 하고, 처음 만나 몇 학번이냐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 묻고,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가 아니라 이웃과 어떻게 지내느냐, 묻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학교를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제 딸들이 남들처럼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행복을 평가하는 가치가 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대안학교에서 배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새로운 가치,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그 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자신의 위치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갈 그런 딸들을 충분히 믿고, 지지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대안학교, #몰입식 교육, #교육감선거, #새로운 가치, #잘사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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