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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기운이 산에 들에 가득 퍼져갑니다. 버들강아지, 오리나무, 매화나무도 앞다투어 꽃과 잎사귀를 피워 올립니다. 이렇게 봄기운이 완연한 일요일 아침. 산으로 갈까 들로 갈까? 여러 가지 고민과 유혹을 뿌리치고 문달암을 찾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로 달려갑니다. 남해고속도로 순천방면 축동 I.C에서 내려 곤양 쪽으로 2km정도 지점에서 사천매향비 팻말 있는 쪽으로 찾아가면 곤양면 흥사리가 나옵니다.

폐사지를 찾아 나서는 답사 여행은 늘 설레임과 두근거림을 가득 느끼게 합니다. 언제 창건 되었는지? 언제 폐사지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습니다. 절터 이곳저곳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기왓조각과 도편 그리고 대나무 밑에 묻혀 있는 주춧돌 흔적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줍니다. 70이 넘으신 동네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어렸을 때까지 석탑도 있었고 상평통보 같은 옛날 엽전 꾸러미도 흔히 발견 되었다고 합니다.

오른쪽 대나무 숲 사이로 한참을 오르면 문달암이 나옵니다.
▲ 문달암 입구 오른쪽 대나무 숲 사이로 한참을 오르면 문달암이 나옵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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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광여도에는 문달암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최근에 발행된 곤양 면지에는 '곤양읍지에 문달사는 제방산록에 있다고 하였으나, 건립 및 상존 년한과 규모는 나타나 있지 않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어 '문달사지(文達寺址)는 명당이라 전해지는 흥사리 최북단 곽가등 아래 제방에서 뻗어내려 온 산줄기에 흥사 도로에서 실개천을 따라 1km정도 떨어진 대밭 속에 주춧돌로 추측되는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기왓장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주변은 완전 대숲으로 덮여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달암 들머리에서 내려다본 곽가등입니다. 예전엔 아래 논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화목이나 도자기들을 싣고 다녔다고 합니다.
▲ 문달암 들머리에서 내려다본 곽가등 문달암 들머리에서 내려다본 곽가등입니다. 예전엔 아래 논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화목이나 도자기들을 싣고 다녔다고 합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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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있습니다. '깨못티'(갯모퉁이)에 가면 향나무를 뻘 속에 묻어 놓고 한자로 그 사실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4,100여명이 향계를 모았고 뻘 속의 향나무가 미륵불이 되어서 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이란 전설같은 얘기였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늘 마음 한켠, 매향비에 대한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문달암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분명 사천매향비의 매향 행사를 추진했던 절이 근처에 있을 텐데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대밭속에 숨겨진 주춧돌과 계단의 흔적들입니다.
▲ 주춧돌과 계단의 흔적들 대밭속에 숨겨진 주춧돌과 계단의 흔적들입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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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관한 여러 자료도 찾아보고 근처 절들을 떠올려 보면서 상상을 해 봅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제일 앞쪽 돌 무더기 있는 곳이 범종각이 있던 자리로 보여집니다. 그 뒤로 보이는 돌무더기 있는 곳에 석탑과 석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그 위에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제일 큰 터가 차례로 이어져 있습니다.

대웅전 주춧돌로 추정되는 흔적입니다.
▲ 주춧돌 흔적 대웅전 주춧돌로 추정되는 흔적입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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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윗쪽 대웅전 자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큰 터에서 발견된 주춧돌 흔적입니다. 너무 큰 돌이라 뒤집어 볼 수 없어 그냥 사진만 찍었습니다. 다른 모퉁이에도 이런 주춧돌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기왓조각 위에 계유 월 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 계유 월 일 기왓조각 위에 계유 월 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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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윗쪽 큰 터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에 새겨져 있는 한자입니다. 무슨 뜻인지를 알아 볼 수가 없어서 답답할 따름입니다. 계유 월 일은 년대를 말하고 있는것 같은데...

시기가 조선 중후기쯤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파편들입니다.
▲ 도편 시기가 조선 중후기쯤으로 추정되는 도자기 파편들입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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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달사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도편들입니다. 조선 중 후기쯤에 만들어진 도자기인 듯 합니다.  주변에는 불당골, 사립골이란 지명이 있고 바로 인근 완사 넘어가는 고갯길 옆에도 절이 있었었는데,동네 어른들 말로는 지금도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어 진다고 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달암은 서기 1808년 무렵 사천시 사천읍에 있던 향교가 사천시 곤양면으로 옮겨지면서 현재 곤양 향교가 있는 자리의 묘를 문달암 뒷산에 이장한 이후  폐사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저곳 문달사지를 둘러보면서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오후 3시가 되도록 배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 절터가 제대로 된 기록도 없이, 발굴이나 고증도 없이 석탑마져 도굴 당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단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4,100여명이나 되는 민중들이 모여 미륵하생을 꿈꾸며 매향의식을 치루었던 문달사가  기왓조각과 도자기 파편만이 뒹구는 폐사지로 전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문달사지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에 백범 김구 선생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나의 소원'에서 몇 문장을 옮겨 보면서 내 고향 사천이 부자 사천이기 보다는 아름다운 사천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도 함께 빌어봅니다.

진상청대죽전(進上靑大竹田)-진상품목으로 지목되어 있던 푸른대나무 밭입니다.
▲ 문달암 근처 대숲 진상청대죽전(進上靑大竹田)-진상품목으로 지목되어 있던 푸른대나무 밭입니다.
ⓒ 윤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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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 '나의 소원' 중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충분히 막을 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사천지역 인터넷 신문 news4000.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문달암, #사천매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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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들로 다니며 사진도 찍고 생물 관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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