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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장독대. 장독대와 항아리를 보면서  고향을 느낀다.
▲ 뜨락의 장독대 내가 만든 장독대. 장독대와 항아리를 보면서 고향을 느낀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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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모퉁이 아니면 뒤뜰의 돌담을 배경으로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장독대, 그 장독대에는 어머니의 심성과 자태를 닮은 옹기, 독, 항아리, 단지라는 정겨운 이름을 가진 크고 작은 독들이 있다.

할머니의 할머니에서부터 어머니까지 이어진 대물림 사랑과 인고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그래서 장독대는 돌아갈 곳을 잃은 현대인들이 떨림 없이 회상하기 어려운 마지막 남은 추억의 공간인지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청명한 날이나 비오는 날 혹은 바람 불고 낙엽 지는 날 창밖으로 보이는 장독대를 보며 괜히 쓸쓸했거나, 하얀 눈을 뒤집어쓴 항아리들을 보며 자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항아리는 언제까지 나를 기다린다고 믿고 싶은, 그래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고 벼르는 정서적 고향의 원형인지 모른다.

그뿐인가. 장독대는 보이지 않는 뒷전에서 화려한 반찬을 반찬답게 만들고, 건강한 밥상을 지켜주었던 힘을 저장하는 보고였다. 은근과 끈기로 익힌 묵은 간장과 된장, 고추장, 잘 익은 젓갈, 고소한 깻잎, 마늘 짱아지가 담긴 항아리들은 가난한 마음을 살찌게 했던 자양분이었다.

그리고 장독대는 집안의 한 부분을 지켜주는 신이 머무는 곳, 어머니들에게 신앙의 공간이었다. 이른 봄 볕 좋은 날, 겨우내 띄운 메주에 맑은 간수를 붓고 부정한 것들은 범접하지 말라고 항아리 둘레에 붉은 고추와 검은 숯이 끼워진 새끼를 둘렀던 어머니의 마음이 살아 있는 곳, 하얀 백지로 버선을 오려 항아리에 거꾸로 붙여 장맛이 좋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주술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장독대는 가족의 불행을 보면 어머니가 제일 먼저 정화수 받쳐 들고 찾아가 새벽 찬이슬에 몸을 적시며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던 어머니의 간절한 땀이 밴 신성한 터였다. 하늘을 향한 어머니의 원망과 축원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추억속의 풍경화의 한 폭이었던 장독대, 한 가정의 살림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장독대가 사라지고 있다. 어머니들의 정성과 은은한 정갈함이 빛나던 항아리들이 둘 곳이 없다거나 무겁고 깨질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버리고 있다.

그리고 장독대 빈자리를 냉장고와 플라스틱 그릇이 차지했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묵은 손맛으로 빚은 음식이 아니라 기계로 찍어낸 개성 없는 음식들이 채워졌다. 냉장고의 크기와 내용물이 부를 상징하는 가늠자가 되었다.

메주는 상품이 되었다. 그나마 된장 간장을 담그는 집은 해마다 줄고, 김장마저 하지 않는 주부들이 늘고 있다. 가마솥 숭늉 맛을 잃었듯 묵은 장맛과 텁텁한 된장국 맛을 잃어가고 있다.

잊을 것은 잊어야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지만, 사라지는 장독대와 버려지는 항아리에서 나는 어머니의 깊은 손맛과 고향의 추억을 묻히는 것 같아 허전함을 느낀다. 민족의 밥상공동체를 무너지고 말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강조한다. 가족 관계는 더 솔직하고 거침없는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반면 불과 한 세대 전에 비해 가족의 깊은 정이 식어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도 들린다. 급속하게 진행되는 가족 해체가 우리 사회의 큰 문제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아마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가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주장만 앞세우는 소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른의 권위로 말을 듣지 않는다고 주리를 틀고, 기껏 소통을 강조하고도 아래 사람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의 말에 대꾸한다며 곤장을 때린다면 그건 ‘소통’을 앞세운 폭력이다.

“내 탓이요.”하는 마음으로 자식들의 불행에 마음 아파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라면 소통이 아무리 좋은 말일지라도 그건 소통이 아니다. 늙은 소와 짐을 나누어지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니라면 소통이라는 단어의 참 뜻은 입에 담은 사람에 의해 오염될 뿐이다.

흙과 불로 빚은 조선의 어머니를 닮은 소박한 자태의 항아리를 본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과 손맛을 담아 두었다가 우리를 감동시켰던 항아리, 우리 밥상의 일등공신이면서 하늘을 향한 어머니의 기원이 박힌 장독대의 항아리를 본다.

할머니 같은 늙은 된장 항아리에서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고추장 단지가 가족처럼 모여 있는 장독대! 그곳에서 나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것을 거부하지 않고 담아 채우고, 훌훌 떠나가는 것을 담담하게 보낼 줄 아는, 그리하여 空(공)의 참의미를 말없이 일깨워주는 작은 부처님을 본다.

생명의 힘을 담았다가 아낌없이 퍼주던 항아리, 어머니의 기원이 고스란히 담아있는 장독대가 사라지는 속도만큼 가족 간의 정은 엷어지고 가족 해체의 속도도 빨라지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우리 삶의 근원적인 근거를 허무는지 모를 일이다.

장독대와 항아리는 느림과 비움을 통해 가족 공동체를 되살리는 정서적 연대의 공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에도 옮깁니다.



태그:#장독대,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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