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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 한국방송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제목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앗, 이 제목, 동명의 영화가 훨씬 앞선 1960년대 개봉되어 메가 히트를 쳤다.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는 1968년에 개봉하여 서울 국도극장 단일관에서만 38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대단한 흥행이다. 하기야 1980년대 출생이고 특별히 영화광도 아닌 내가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줄거리를 알 정도로 유명했으니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미워도 다시 한 번>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물론 내용은 영화와 다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영화 제목을 그대로 드라마에 가져다 쓰는 게 유행인가 보다. 얼마 전 종영한 KBS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 주말드라마의 강자 SBS <가문의 영광>, 이동욱과 오연수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MBC 주말드라마 <달콤한 인생> 등 요즘 들어 영화 제목과 똑같은 드라마들이 종종 보인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제목을 가져다 씀으로 인해 예상되는 홍보 효과도 만만치는 않을 터. 하긴 나부터도 '그 제목 어디서 들어봤는데?' 하면서 한 번 더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되니 말이다.

 

 방영 2주차의 <미워도 다시 한 번>, 조짐이 심상치 않다. 지난 4일 첫 회에서 16.4%(TNS미디어코리아)의 시청률을 올리며 경쟁작 <돌아온 일지매> <스타의 연인>을 누르고 단숨에 수목드라마 1위를 꿰차고 나서 2주째 거침없이 순항 중이다. 지난 11일 방영된 3회 시청률은 17.8%(이하 동일기준), 4회 시청률은 20.5%로 방송 4회 만에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수목드라마 1위 자리를 굳건히 다졌다. 그 탓에 황인뢰 PD가 야심차게 준비한 <돌아온 일지매>와 한류스타 최지우의 화려한 복귀작 <스타의 연인>은 체면을 심하게 구긴 상태이다.

 

재벌·불륜 타령이라기에 고개 흔들었는데... 

 

이제 와서 고백하건데, 나는 이 드라마를 첫 회부터 본방 사수하진 않았다. 제목이 귀에 익어서, 또 내가 평소 좋아하는 전인화, 박상원 등이 출연한다기에 '아, 그럼 한 번 봐야지'했다가, 재벌과 불륜, 그리고 출생의 비밀,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믹스된 드라마라는 얘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 놈의 재벌 타령, 불륜 타령, 출생의 비밀 타령 좀 안 할 수 없나 싶기도 했고, 상류층 재벌이야기라면 이미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 주말드라마 <유리의 성> 등에서 원 없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미워도 다시 한 번>, 그런데 이 드라마, 생각 외로 재밌었다. 그리고 잘 만들었다. 일단 배우들 연기가 합격점이다. 박상원, 최명길, 전인화로 이루어진 중견 연기자 쓰리톱 체제는 극에 안정감을 실어준다. 중년의 남녀가 주인공인 드라마도 드물거니와, 최근 드라마들은 연기경험이 부족한 신인급 스타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주조연급 중견 연기자들을 후위에 기용해 연기력 논란을 불식시키고, 극에 안정감을 더하는 추세였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이렇다 보니, 일부 연기력이 검증된 중견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이 반복되는 현상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미워도 다시 한 번>은 그 발상을 역으로 뒤집어 중견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신인 배우들이 그 뒤를 받치는 식의 포맷을 짰다. 주연에 박상원, 최명길, 전인화, 신인급 조연으로 한예인, 이시영, 그리고 박예진, 정겨운의 가세는 이들 신구 조화에 매끄러운 가교 역할로 멋진 앙상블을 만들어내고 있다.

 

중견 3인방의 연기야 말할 게 없고, <패밀리가 떴다>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던 박예진은 한동안 정극에서 떠나 있어 감이 떨어졌을 것이란 우려를 불식시키고 놀라운 몰입력을 보여줬다. 정겨운 역시 호흡을 맞추는 박예진에 비해 다소 눌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채 내면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재벌 2세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다.

 

이 드라마, 생각 외로 재밌네!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 한국방송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또한 만족스럽다. 사실 <미워도 다시 한 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새롭지 않다. 무소불위의 재벌가 주인, 순종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내연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자신만만한 커리어 우먼,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방탕한 재벌 2세 등 이미 여러 차례 봐왔던 캐릭터들의 향연이다. 너무 많이 익숙해서 자칫 진부하기까지 할 수 있는 이런 고전적인 캐릭터들이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선 설득력 있게 그려져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인물의 캐릭터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만 단편적이어선 안 된다. 인물의 행동에 어떤 당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단편적이어선 보는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요즘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 등장하는 악역 신애리를 보자. 신애리는 전형적인 악인이다. 그녀가 악을 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출세욕을 위해 사업을 지켜야 하고, 아들에게 자신과 같은 경험(부모 없이 자란)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가정을 지켜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그녀가 악을 행하는 이유다.

 

 오로지 악행만을 일삼는 전형적인 악인이기에 죄책감도 거리낌도 없다. 게다가 스피디한 전개로 인해 캐릭터 내면의 어떤 다른 것을 끄집어낼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이렇게 지나치게 단편적인 1차원적인 캐릭터는 그만큼 단순명쾌하지만 또 그만큼 쉽게 질리게 만든다. 지금 시청자들이 <아내의 유혹>을 즐겨보는 이유는 그녀에게 공감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일삼던 그녀가 대체 종국에 가선 어떤 꼴이 되려는지, 오직 그것 하나가 궁금해서이다.

 

 그런 면에서 <미워도 다시 한 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일관성은 있되 다분히 복합적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게 전부가 아닌,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이 공존하고, 그것들은 서로 끊임없이 상충한다. 극의 흐름 역시 지나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각 인물들의 캐릭터를 충실하게 설명해준다.

 

사건의 전개 역시 개연성이 뚜렷하다. 요즘 범람하는 막장드라마라는 용어, 이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사건의 개연성 여부야말로 단연 첫째 가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연장방송을 위해, 혹은 시청률을 위해 자극적이고 지극히 비상식적인, 앞뒤 전혀 맞지 않는 사건을 위한 사건의 남발은 막장드라마가 갖고 있는 필수요소 중의 하나이다.

 

이제 겨우 4회 만을 방영했을 뿐이지만 적어도 아직까진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사건을 발견하기 어렵다. 대기업 총수인 한명인(최명길 분)의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에서 빚어지는 행동이나, 당차고 자신만만한 최윤희(박예진 분)의 저돌적인 모습이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들은 충분히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막장이냐, 명품이냐' 기로에 선 <미워도 다시 한 번>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 ⓒ 한국방송

재벌, 불륜, 그리고 출생의 비밀, 한국드라마를 좀 먹는 3대 막장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런 자극적이고 상투적인 소재로 그렇고 그런, 빤한 이야기만을 그려내는 데 있다. 가령 2007년 숱한 화제를 낳았던 김수현 작가의 <내 남자의 여자>는 재벌과 불륜이란 소재를 다룬 드라마였지만, 그 흔한 막장 소리 한 번 듣지 않았다. 오히려 방영 내내 명품드라마로 불렸다.

 

 그 이유는 이야기의 참신성 때문이었다.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내연녀는 끝내 천벌을 받고, 버림받은 조강지처는 훗날 크게 성공한다'는 불륜 드라마의 기존 공식을 포테이토칩처럼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불륜에 집중하여 극의 긴장감을 높이려 하기보단 불륜이 벌어지고 발각되고 난 그 이후의 상황을 통해 당사자들 간의 심리 묘사에 치중했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첫걸음을 뗀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막장드라마로 가느냐 명품드라마로 가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불륜과 재벌, 출생의 비밀이란 다루기 쉬운 소재를 이용해서 자극적이고 상투적이며 개연성 없는 사건들로만 채운다면 여지없이 막장의 딱지가 붙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사랑, 질투, 애증과 같은 욕망, 심리 등을 치밀하게 묘사해내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다면 '잘 만들어진 불륜드라마'라는 호평을 들을 것이다. <미워도 다시 한 번>에 푹 빠진 시청자 입장에서, 모쪼록 제작진이 전자보단 후자의 길을 걸어가길 바랄 뿐이다.


#막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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