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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여자 아이 하나가 뒤에 뭔가를 감추고 슬슬 다가옵니다. 얌전하고 내성적인, 발표도 적은 아이인데 요즘 저와 제법 가까워진 아이입니다.

 

“제가 떡국남자 사진 보여드릴까요?”

떡국남자라, 갑작스런 질문에 제대로 듣지 못해 다시 물었습니다.

 

“떡국? 와! 그런 사진도 있어?”

 

순간 주변에 웃음이 터집니다.

“아유, 떡국이 아니라 꼽뽀다 남자 사진요.”

 

 

꽃보다 남자. 꽃과 남자라는 체언 사이에 비교격 조사가 붙은, 제목만으로는 섣불리 국어 문법을 분간하기 어려운 문장. 요즘은 이런 제목이 뜬다지요?

 

“꽃보다 남자 드라마 재미있니?”

“네. 저는 일편부터 봤어요. 애푸뽀가 나와요.”

 

애푸뽀. 아직은 발음이 많이 꼬이는, 그래서 애푸뽀를 발음하는 아이들의 입술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양이 앙증맞습니다.

 

“F4의 F는 무슨 뜻일까?”

“쁠라워요. 꽃이잖아요.”

“그래? 그럼 그냥 꽃4라고 하지 왜 애프라고 썼을까?”

“애푸뽀라고 하면 더 멋있죠. 구준표랑 김현중 짱이에요.~”

 

꽃보다 남자 드라마 보는 아이가 우리 반 서른세명 중 스물 한 명. F4 배우 이름을 모두 아는 아이는 열 여섯 명. 그리고 F4의 친구 이름까지(잔디..?) 안다고 하는 아이도 몇 명. 오늘 아침, 즉석 조사한, 평범한 도시 초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의 미디어 통계입니다.

 

“꽃보다 남자는 무슨 내용이야?”

“애푸뽀랑 구혜선이랑 사귀는 내용이예요.”

“와, 그럼 네 명이랑 한 여자랑? 와, 그 여자 되게 좋겠다.”

“선생님은 나이가 많은데 뭐가 좋아요?”

 

아이쿠. 아이들은 금세 F4와 나를 동일 선상에 놓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의 비교방식은 원래 이렇습니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 비교의 기준이다보니 명쾌하지요. 그렇다보니 짧고 단순합니다. 긴 대화가 힘든건 그래서입니다. 순간적이지만 아이들 덕분에 F4와 동급이 되다니. 그리 나쁘진 않군요. 그래, 너희들이 보기에 난 애푸뽀는 틀렸다 이거지? 아이고, 그래도 부러워라.

 

“우리 반 친구들 드라마 좋아하는구나.”

“우리 엄마는 요즘 드라마는 아내의 유혹이랑 꽃보다 남자 밖에 볼 게 없대요.”

 

아이들과 얘기를 나눈 시간은 불과 삼 분 정도. 내가 이 아이들과 한 해를 보내는 동안 가장 속도감 있고 몰입이 강한 대화였습니다.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과 똑똑한 목소리로 드라마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저렇게 활발한 대화를 하는 아이들이 왜 수업시간엔 발표를 그토록 곤혹스러워 했을까. 자기가 본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봇물처럼 이야기를 쏟아내는 능력의 아이들이 그래서 대부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공부 내용 앞에서는 왜 입을 꼭 다물었을까.

 

미안해라. 내가 공부라는 무기를 들고 너희들을 위협 했었구나. 그러면서도 요즘 아이들은 갈수록 발표를 잘 안한다고, 그렇게 공부해서 무슨 큰 인물이 되겠냐고 너희들을 구박했구나.

 

“얘들아, F4가 좋은 이유를 말해 볼 사람?”

“친절해요.”

“잘 생겼어요.”

“차가 되게 좋고요. 옷이 멋있어요.”

“쎈쓰있어요.” 쎈스? 요놈 이걸 알긴 알고 하는 걸까...?

“키쓰를 잘 해요. 맨날 키스하는거 나와요.”

 

키쓰? 드라마를 전혀 보지 못한 나와 아이들의 대화는 어느새 자상한 아이들의 설명을 들으며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이제는 오히려 아이들이 즐기는 상황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그럼 F4가 안 좋은 사람은 없겠네?”

“전 싫어요. 금잔디랑 키쓰만 해요.”

 

좋은 이유와 싫은 이유가 드라마의 내용에 대한 호불호로 갈리는 걸 보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드라마를 즐기는 현실이 쉽게 바뀔 것 같지는 않지요?

 

드라마일 뿐인데... 질투 하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태그:#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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