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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다이라 트레일 레이스 시작

 

‘수가다이라’는 스키장 동네인 만큼 처음 출발도 스키장이었다. 대회장 분위기는 마치 유럽 알프스에서 벌어지는 어느 대회를 연상 시키는 기분 좋은 모습 그대로다.

 

일본의 유명 트레일 레이스 전문 선수인 ‘카부라키 츠요시’를 비롯한 몇몇 초청선수들의 인사와 간단한 식전 행사를 마친 후, 364명의 40km 코스 선수들과 179명의 15km 코스 등록 선수들이 시차를 두고 일제히 뛰쳐나갔다.

 

코스 초반은 스키장 슬로프를 타고 오르는 급경사다. 처음에는 달리기를 하지만 이내 지쳐서 걸어간다. 몸이 풀리기 전이라 다리의 근육이 터져나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저 멀리 점점 멀어지는 선두 주자들의 모습은 마치 개미들이 줄을 지어 산을 넘어가는 모습 같다. ‘저것들은 인간도 아니여.’ 가까이 하고 싶지만 멀어져만 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끼리 중얼거린다.

 

두 개의 급경사 슬로프를 넘으니 내리막이 시작된다.

 

내가 누구인가? 내리막의 폭주 기관차 아닌가! 튼튼한 무릎, 올바른 착지와 안정된 주법으로 내리막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하다. 단숨에 수십 명의 참가자들을 제쳐버리고 첫 번째 Aid Station(에이드 스테이션: 보통 Check Point(CP)로 불리며 물, 간단한 음식, 의료 서비스를 제공)까지 내달렸다. 하지만 또 다시는 시작되는 급경사의 스키장 슬로프에 기가 죽어 투어리스트 모드로 급전환했다.

 

 

5번의 고봉 찍기와 노구치 크로스 컨트리 코스

 

정상에 오르니 주변이 활짝 열리며 인근 마을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코스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하나는 닫힘과 열림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수가다이라 레이스 코스는 가장 기본에 충실한 우수한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아래쪽에서 봤을 때 이곳은 산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산으로 보였다. 하지만 막상 위로 올라오니 생각보다는 넓은 평원이었다. 주변에는 꽤 큰 규모의 양잔디 축구장이 있었는데, 해발 1500m에 위치한 이곳의 축구장은 프로팀들의 전지 훈련 장소로 이용된다고 한다.

 

지구력을 요하는 운동 경기에서 고지 훈련의 탁월한 효과는 이미 입증됐다. 우리에 비해서 다양하고 우수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일본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순간 한편으로 ‘그런데 이런 환상적인 시설을 가지고 있지만 왜 성적은 그 모양 그 꼴일까?’라는 의구심이 강하게 증폭이 되고 있었다.

 

 

대회 코스는 크게 5번의 고봉 찍기를 해야만 결승점을 만날 수 있다.

 

먼저 1200m에서 출발을 한 후 해발 1600m의 수가다이라 목장을 통과하고 1975m의 아즈마야산, 2127m의 네꼬다께를 넘어 1500m의 아시도야마,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1600m의 오마츠산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완주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 외 수시로 나타나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이어지는 언덕들은 걷기만 해서는 도저히 10시간의 제한 시간 안에 40km를 완주 할 수 없는 난이도를 갖추고 있었다.

 

나의 경우 오르막에서 허비한 시간을 내리막에서 죽으라 달려 보충을 해야지만 2개의 관문에서 제한 시간에 안 걸리고 넘어 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웠던 수가다이라 목장과 그 유명한 ‘노구치 크로스컨트리 코스’를 달릴 때는 모두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감탄사가 마치 신음 소리처럼 사방에서 서라운드 돌비스테레오로 들리기도 했다.

 

 

"사무이 사무이, 다까라 하시루요!"

 

1975m의 아즈마야산을 오르니 1600m 지점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느낀 점은 일본의 흙은 화산 영향 때문인지 검은 색을 띄면서 먼지가 별로 안 났다는 점. 분명 한국과는 다른 토양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생김새는 비슷해도 문화가 너무나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기분 좋게 내달려 산을 내려오니 얼마 후 2127m의 네꼬다께를 오르는 또 다른 코스가 시작된다. 정말 끝이 안 보이는 급경사다. 반대편으로는 이미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참가자들의 행복한 얼굴들이 오버랩된다. 그 순간 부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본색을 감추고 있던 날씨가 화풀이를 하듯 바람과 함께 기온이 급강하를 시작한다. 같이 동행하던 ‘미에’가 추위에 정신을 못 차린다. 얼어 붙은 입으로 ‘유상, 사무이 사무이’(추워 추워)를 외친다. 이럴 때는 방법이 없다. 매몰차게 대해야 한다. ‘다까라 하시루요!’(그러니까 뛰어!). 사실 급 경사의 언덕을 올라가는데 어떻게 뛰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런데 이 언니 나 혼자 내팽개치고 갑자기 급경사의 언덕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뛰라고 했다고 진짜 뛰어 올라간 것이다. 나중에 물어보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생존 본능에 의해서 엄청난 괴력, 즉 초능력이 발생됨을 현실에서 경험했다.

 

서로 버텨 주던 바람막이가 없어지니 순간적으로 추위가 몰려온다. 하지만 나의 경우 극한의 상황이 아니었던지 초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힘겹게 힘겹게 미에보다 10여분 늦게 정상을 찍었다. 정상의 온도는 영상 2도.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쯤 되는 것 같았다. 자원봉사자들이 두툼한 방한복으로 무장하고 격려를 해준다.

 

 

또 다른 난코스

 

대회 코스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찍었기에 이제 대회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고,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27km지점의 해발 1300m 제 1일 관문까지 내리막이라 미친 듯이 달려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다.

 

제한 시간을 1시간 이상 남기고 제 1 관문을 통과하자 여유를 찾았다. 앞으로 남아 있는 코스의 산은 높아야 1500~1600m의 낮은 산들이다. 말 그대로의 경치 관람을 하는 뷰포인트를 이미 지났기에 별다른 기대 안하고 쉬엄쉬엄 레이스를 즐기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코스에 들어서자 작은 언덕들의 연속이었다.

 

사막으로 치면 스몰듄(Small Dune: 작은 모래 언덕들의 연속)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커다란 빅듄(Big Dune: 높이 수십에서 백 미터 이상의 높은 모래언덕)은 한번 넘어가면 끝인데 작은 모래언덕들은 넘고 넘고 또 넘고 계속 넘어야 하기 때문에 체력 소모와 피로가 더 심하다.

 

이곳 코스도 계속되는 작은 언덕들의 연속이다. 올라가는 것이 적응될 만 하면 내려가고, 내려갈 때 탄력 붙어 속도 날만하면 올라가고, 힘은 힘대로 들고 속도는 속도대로 안 나는 짜증 가득한 코스다.

 

 

27km 제1관문에서 31km 지점의 제2관문까지 왜 그리 멀게 느껴지던지 중간에 길을 잃어 버린 줄 알았다.

 

대회에 나가 보면 동, 서양을 막론하고 자원봉사자들이나 운영요원들은 항상 거짓말쟁이가 된다. 모두 하는 소리가 ‘이제 다 왔습니다. 힘내세요’ ‘앞으로 1km 남았습니다’ ‘이제부터 코스는 쉽습니다’ 등의 나름 힘을 주는 멘트를 날려준다. 뻔히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동일한 상황에 처하면 어쩜 그리 단순하게 속아 넘어가는지 뒤돌아서면 궁금하고 욕이 절로 나온다.

 

제2관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니 자원봉사자 언니들의 경쟁적인 애정공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외국인에 대한 현지 언니들의 과도한 애정공세에 심통이 났는지 갑자기 담당 아저씨가 남아 있는 코스 설명을 해주었다. 작은 언덕을 오르면 계속되는 내리막이라 여유 있게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니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담 없이 언덕을 오르는데, 이건 뭐 계속 오르막이다. ‘뭐가 작은 언덕이야’ 완전 속았다는 생각으로 혼자 궁시렁거리며 한참을 가니 운영요원이 박수를 치며 환대를 해준다. 그러면서 진짜 마지막 언덕이라며 저 멀리 산을 보여준다. 난 순간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

 

‘저게 무슨 언덕이야? 완전 산이구만…’ ‘잠깐 저건 뭐야?’

 

까만 점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산을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너무나 끔찍했다. 힘도 없고 추위에 떨어서인지 속도 거북하고 배 고프고…

 

다행히 먼저 가던 ‘미에’를 중간에 만날 수 있어서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힘들어서 나뭇가지를 찾아 지팡이 같이 사용해 간신히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정상을 오르니 발 아래로 지나왔던 코스와 마을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너무나 아름답고 상쾌하다. 정말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뿐이다.

 

9시간 31분 53초. 한국에서 온 ‘유상이 골인합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방송과 박수 속에 ‘미에’와 함께 골인을 했다. 비록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너무나 즐거웠던 레이스였다.

 

 

덧붙이는 글 | 사막의 아들 유지성 / www.runxrun.com 
사막, 트레일 레이스 및 오지 레이스 전문가. 칼럼니스트,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 남극 레이스, 히말라야, 아마존 정글 마라톤, Rock and Ice 울트라 등의 한국 에이전트이며, 국내 유일의 어드벤처 레이스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태그:#트레일레이스, #마라톤, #일본, #사하라사막마라톤대회,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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