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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시절 임포(林逋)라는 시인은 세속의 명리를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를 처로 학을 자식으로 여기며 살다 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퇴계 선생이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여 매화분(梅花盆)을 항상 곁에 두고 사셨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음을 알고 있다.

매실로 담근 술을 좋아하는 터라 겨울 매화보다 초여름에 수확하는 매실에 관심이 더 많은 속인 주제에 그 분들이 매화를 사랑했던 정신세계를 알 수 있으랴만, 지난 22일부터 광주 국립박물관에서 [探梅, 그림으로 피어난 매화]라는 제목으로 기획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29일) 아내와 함께 ‘탐매’에 나섰다.

전시장 일부 전시장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었는데 어려웠다.
▲ 전시장 일부 전시장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었는데 어려웠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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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림을 보는 안목도 없고 이론마저 배운 적이 없기에 그림의 진수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다. 때문에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전시회가 많지 않다는 생각에 그냥 눈요기나 하자고 나선 발길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갓 피어난 매화, 수백 년 지지 않고 피어있는 매화향이 가득했다. 고작 들었던 풍월을 동원하여 구도와 색의 농담, 작가의 지명도. 작품의 희소성과 가치나 따졌던 속인을 왜소하게 만드는 서늘한 기운이 있었다.

매화마을에서 보았던 산뜻한 느낌이 아니었다. 매실을 수확할 때 맛보았던 풋풋함이 아니었다. 잘 익은 매실주를 마실 때의 맑은 취기도 아니었다. 성글고 늙은 고목의 가지에서 피어난 작은 꽃들은 묽으면서도 깊은 감동이었다.

보는 눈이 밝지 못한 주제에 개개의 작품을 평하고 작가의 세계를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느낌이지만 내 취향으로는 화사한 홍매보다는 백매가 좋았고, 퇴색한 종이의 연륜 때문인지 최근의 작품보다는 조선시대의 작품이 더 깊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 화가들의 작품도 자연스러운 흐름, 산뜻한 기교가 뛰어났지만 다만 눈부시지 않으면서 얼음 같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 맛은 옛 선인들의 작품이 낫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쉽게 볼 수 없는 조선시대의 작품을 한꺼번에 보고 안목을 넓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지인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 설명 매화 소개가 좋아서 찍었는데 글씨가 흐리다.
▲ 전시회 설명 매화 소개가 좋아서 찍었는데 글씨가 흐리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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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학사에는 고려 중엽부터 이규보를 비롯한 시인들이 매화를 주제로 쓴 시를 남겼고, 고려 말에도 목은 이색, 원천석 등등의 분들이 매화를 형상화한 문학작품을 남겼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매화를 그린 화가도 있었을 법한데 남아있는 작품이 없는 것인지 전시된 작품 중에서는 고려시대의 그림은 한 점도 안보였을 뿐 아니라 조선 초기의 작품도 찾을 수 없었다.

청자에 상감된 매화문양 백자에 피어난 매화는 있는 것으로 봐서 매화를 그린 화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은 매화 그림은 없다니, 유난히 외침이 잦았던 우리 역사 때문이라고 이해도 되었지만 조금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자연에도 사계절이 있듯이 한 국가도 흥망성쇠가 있고, 개인들의 인생도 굴곡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아무리 험한 세상, 힘들고 괴로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가끔은 남들이 그려 놓은 높고 아득한 경지와 청량한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전시장 일부 작품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소치를 비롯한 남도 작가들의 작품이다.
▲ 전시장 일부 작품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소치를 비롯한 남도 작가들의 작품이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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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는 단순히 봄을 상징하는 것만은 아니다. 매화는 얼어버린 땅, 칼바람 부는 곳에서 겨울을 의연하게 이겨내고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 혼란, 경제 불평등, 사회혼란의 와중에서 헤매는 많은 사람들이 매화를 보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은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라는 시조를 남겼다.

틈을 내어 다시 한 번 가서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지금 광주에서는 보기 드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현대미술관에서는 옥공예전과 남농 작품 전시회가, 박물관에서는 기획전으로 고금의 매화가 전시되고 있다. 관심있는 분들의 관람을 권하고 싶다. 이 글은 한겨레 블로그에도 옮긴다.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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