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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왕과 최악의 왕 - 1

 

봉건시대 왕은 나라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이자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에 왕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그런데 문제는 유능한 왕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반면, 무능한 왕은 자주 출현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27명에 달하는 조선의 왕 가운데 최고의 왕과 그 반대에 위치한 왕은 누구일까? 일단 최고의 왕부터 검증해보자, 대부분은 4대 세종(世宗, 1397-1450)을 1위로 선정할 것 같다. 세종이 성군聖君이라는 극한의 찬사를 받는 것은 그만한 업적이 있기 때문이며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하지만, 가장 뛰어난 왕은 3대 태종(太宗, 1367-1422)이 아닌가 싶다.

 

태종은 즉위 과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태종이 왕자 시절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태종이 부친 이성계에게 반역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적지 않은 지면紙面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세한 언급은 피하겠지만, 스스로의 결단으로 칼을 뽑아 왕위에 오른 사례는 태종이 유일무이하다. 11대 중종(中宗, 1488-1544)과 16대 인조(仁祖, 1595-1649)가 반정反正으로 포장된 반역을 통해 즉위하기는 하였지만 스스로의 결단에 위한 것은 아니었다. 중종과 인조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왕위에 올랐으며 태종처럼 강력한 왕권王權을 휘두르지 못했다. 이성계가 반역을 통해 왕위에 올라 태조가 되었다지만 브레인인 정도전이 없었다면 감히 반역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처음부터 반역을 주도적으로 기획하였으며 왕이 된 다음에도 가장 강한 왕권을 누렸다.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는 자신의 저술 <군주론君主論>에서 “군주가 권력을 성취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이며 잔혹해야 한다”는 논리를 설파하였는데, 조선에서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가장 합당한 왕이 바로 태종이었다. 태종은 정치적 기반이 되어주고 반역에 동참한 자신의 처가를 몰살해버렸으며 아무리 심복이라도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면 가차 없이 제거해버렸다. 큰 도움이 되었던 처가의 씨를 말리다시피한 것은 왕조에서 필연적이랄 수 있는 외척의 발호를 싹부터 잘라버린 것이며, 아들 세종의 처가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심복을 잔혹하게 제거한 것도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영화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정치판의 논리에 입각하기도 하였지만, 그것 역시 강해진 심복들이 왕실을 위협하는 것을 경계한 조치였다.

 

태종의 치세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사병私兵의 혁파’인데, 태종의 카리스마와 정치력이 아니었다면 사병을 혁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태종이 자신을 도와 반역을 성공시킨 공신功臣 세력들이 보유했던 막강한 사병을 혁파하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우환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공신들과 사병을 분리한 것은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여 이후 조선의 안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도전이 무너진 직접적 요인이 사병을 혁파하다가 태종 이방원에게 기습을 당한 것인 만큼, 태종이 이룬 사병혁파는 역사적 의미와 비중이 대단하다.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자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며, 이성계라고 해도 언감생심이었으니 태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을 폐하고 셋째 충녕대군忠寧大君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극찬을 받아 마땅한 쾌거였다. 양녕대군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극도로 무도하고 황음하며 비정상적인 등등, 제왕이 절대 가지지 말아야 할 요소를 두루 갖춘 자였다. 만일 양녕대군이 장남과 세자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받아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건국한지 불과 몇 십 년도 지나기 전에 성장동력을 상실하고 쓰러졌을 확률이 높았다. 자신이 반역을 통해 즉위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정상적인 후계구도를 원했을 태종이지만 그는 개인적인 소망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명군明君이었다. 태종의 대의적인 처신은 세계역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성군 세종을 탄생시켰다. 국가를 위한 태종의 배려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세종에게 양위하여 제왕의 수업을 쌓게 하였으며 세종의 처가를 제거하여 외척의 발호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무능한 자들을 일찌감치 제거하여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료들을 물려주었으니, 세종이 일할 수 있는 기반은 전부 태종이 마련해 주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세종 1년(1419)에 실행되어 세종의 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대마도정벌對馬島征伐도 사실상 태종의 작품이었다. 태종은 왕위를 물려준 다음에도 병권兵權을 장악하였는데, 세종을 참여시켜 대마도정벌을 기획하고 시행함으로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세종이 영토 확장 전쟁을 벌여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태종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그처럼 태종은 ‘준비된 왕’이었으며 ‘제대로 일할 줄 아는 몇 되지 않는 왕’ 가운에서도  최고의 수준에 오른 왕이었다. 

 

내가 태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또 있다.

 

대호군大護軍 지함池含을 함길도에 보내어 함길도도안무사(咸吉道都安撫使, 함경도의 총책임자) 이지실李之實에게 전지하기를,

“용성龍城의 성자(城子, 성벽과 해자垓字)를 쌓는 것을 이미 시작하였거든 이번 가을에 다 쌓고, 만일 역사를 시작하지 않았거든 도안무사가 경성절제사(鏡城節制使, 경성의 사령관) 황상黃象과 더불어 전에 간 지리地理하는 사람 이양일李良一 을 데리고 부가적富家狄과 시원時原 사이에 성을 쌓을 만한 곳을 택하여 용성의 성을 쌓는 군사에다가 적당하게 수를 더하여 뽑아서 목책성木柵城을 설치하고 경원부慶原府를 두라.”

<태종실록> 34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8월 22일

 

 
이날의 실록은 북방의 최전방에 성벽과 요새를 설치하는 내용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경원부慶原府를 두라’는 등으로 구체적인 영유 계획이 진행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경원은 자료 그림에서 보듯 두만강에 근접한 북쪽 끝 지역이다. 그림은 세종시대의 영토로서 태종 당시에는 경원이 조선의 확고한 영토가 아니었다. 이성계의 가문이 그쪽에서 발상했지만 여진족 오랑캐들이 끊임없이  준동하는 바람에 태종 10년(1410)에는 경원부를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7년이나 폐지되었던 경원부를 태종이 다시 부활시킨 것은 명나라 때문이었다. 명나라가 내관內官 장신張信이라는 자에게 1만이 넘는 대군을 주어 두만강 북쪽 지역에 파견하였는데, 성책을 세우고 농사를 지어 군량을 자급할 준비를 갖추는 등으로 조선을 자극했다. 명나라도 여진족들에게 골머리를 앓던 나머지 그곳에 군사지역인 위衛를 설치할 계획이었지만 실제로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킬 의도는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주둔할 모습을 보이면 위협을 느낀 여진족들이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고, 그들을 잘 대우하면 자연스레 이간질의 효과를 얻게 되며 협조적인 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완충지대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나 알게 된 사실이었다. 게다가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기 전에 ‘국경이나 그에 준하는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통보해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어긴데다, 해당지역을 영유하려는 것 같은 명나라의 태도는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었다.

 

고려가 멸망하는 직접적 빌미가 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도 명나라가 고려에게 영토를 요구한 것에 있지 않았던가, 명나라의 주원장이 고려가 원元제국에게서 탈환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영토로 편입시키겠으니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고려가 이판사판으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그때 이성계가 반역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았다면 고려와 명나라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했을 터였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조선으로서는 명나라가 두만강 건너에서 벌이는 일련의 군사행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 명나라 부대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쩔 것인가? 실록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필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배할 때 태종이 선택한 것은 가장 온건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7년 전에 폐지하고 후퇴시켰던 경원부를 부활시킨 것은 여기가 조선의 영토라는 분명한 선언이었다. 그곳에 부대와 백성을 파견하여 성책과 요새를 건설하는 광경은 명나라의 정찰에게 똑똑히 목격되었을 것이었다. 이후 명나라가 자신들의 의도를 밝히고 다시 돌아갔지만, 만일 태종이 명확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지 단언하기 어렵다. 명나라가 사전 통고 없이 군사행동에 들어간 자체가 조선을 탐색할 목적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바, 태종처럼 대처하지 않았다가는 크게 곤욕을 치렀을 확률이 결코 적지 않다. 중국이라면 알아서 설설 기었던 조선이기에 태종의 행동이 특히 돋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세종이 추진하여 현재의 국경으로 기능할 북방육진北方六鎭의 기초까지 다져주었으니 태종은 최고의 반열에 올리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      

 

* 태종과 세종 외에도 9대 성종成宗과 21대 영조英祖, 22대 정조正祖도 걸출한 왕으로 꼽힌다. 나는 특히 정조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정조의 즉위 과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험난했던 데다 즉위한 직후부터 강력한 적들에게 둘러싸인 최악의 환경을 헤치고 이뤄낸 업적이 참으로 경탄스럽기 때문이다. 정조가 만일 세종처럼 전임 왕이 전격 지원하고 최고로 검증된 신료들의 보필을 받을 수 있었다면 세종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 못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자고로 사람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하는 법이지만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그 정도의 성과를 이룬 정조는 참으로 대단한 제왕이 아닐 수 없다.  


태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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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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