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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경기전에 보관된 이성계의 어진어진(御眞, 영정)입니다.
▲ 태조 이성계의 영정 전주의 경기전에 보관된 이성계의 어진어진(御眞, 영정)입니다.
ⓒ 전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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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즉위한 것은 고려高麗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 4년(1392) 7월 16일이었다. 당시 수도였던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에게 양위 받는 형식으로 즉위하였는데, 그때까지의 이성계는 고려의 국왕일 뿐이었다.

이성계를 앞세운 급진과격파들이 고려의 틀을 유지하고 그 내부에서 개혁하려는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등의 기존 세력을 격파하고 조선朝鮮을 건국한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지은 지 오래된 주택을 고치고 개량하는 것보다는 아예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세금을 거두고 내보내는 라인의 유지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인데, 이미 34대에 걸쳐 475년이나 걸쳐 사용된 고려의 세금 라인은 매우 노후 되고 곳곳에서 누수 되는 등 지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것을 왕창 뜯어내고 새로운 배관망을 설치하여 민생을 되살리기 위한 가장 좋은 방책은 신국新國으로 하여금 구국舊國을 대체시키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브레인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정식적 지주 무학(無學, 1327-1405)의 정책과 지도는 뛰어났으나 국호國號를 조선으로 정한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황제에게)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國號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태조실록>>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1월 29일

국호를 받기 위해 보낸 한상질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기도 한데, 아무튼 부여받은 임무를 성공시켰다. 이후 고려를 대체할 신국은 조선으로 명명되었으며, 지금의 우리와 동일한 유전적 구조를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의 강국인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셔서 안전을 확보하고 중원 중심의 질서에 편입되어 정통성을 갖추려는 의도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국호까지 받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그것도 ‘조선과 화령’의 두 가지를 제시하고 그 가운데 하나로 골라달라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다음 미국을 종주국으로 모신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국호는 우리 스스로가 정했다. 세계역사를 통틀어도 다른 나라에게 국호를 받은 사례가 지극히 드물지만. 그것도 자신들이 두 가지 이상으로 압축하여 골라달라고 애걸한 것은 조선이 유일하다 할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국호가 내포한 의미를 보자. 화령은 이성계가 나고 자란 함흥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만하면 국호로 합당하다 할 것이다. 그냥 화령으로 할 테니 승낙해 달라고 해도 명나라는 문제없이 승인했을 터인데, 정작 문제는 화령과 함께 제시된 조선이었다.

자신을 세계의 원류이자 중심인 중원中原으로 자처하는 대륙세력에게 조선은 어떤 존재였는가, 지금 말하는 조선은 사서에 고조선古朝鮮으로 표기되는 최초의 조선이다. 단군檀君으로 상징되는 조선을 길게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조선의 역사는 최소한 중원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욱 깊다.

자신이 유일하게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하며 왕을 천자天子로까지 호칭하는 중원의 시각에서 단군의 조선은 심각하고 결정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중원은 조선을 격하시키기에 광분했다. 그들은 BC 11세기 무렵인 주周 무왕武王 시절부터 조선을 지방정권 쯤으로 폄훼하였는데, 주장하는 근거가 가소롭기 짝이 없다. 무왕이 멸망시킨 상(商, 또는 은殷나라)에서 태사太師라는 직책을 지내던 기자箕子라는 자가 동쪽의 조선으로 망명하자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임명하였으니, 그게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으로서 그때부터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논리다.

스스로의 입으로 이미 조선이 있다고 공언하였다면 조선이 국가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인데, 중국에서 벼슬해먹던 자가 망명하였다는 이유로 하여 조선을 자신들의 등기부등본에 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까마득한 과거에 멸망한 조선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거니와 그쪽 나라들은 계속 역사왜곡에 주력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성계(정확히는 정도전이)가 주목한 것은 중원 중심의 사관史觀이었다. “국호를 조선이나 화령 가운데 하나로 정해달라”는 요청은 조선을 제후국으로 폄훼하는 중원의 사관에 입각한 것이었다. 명나라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자신들도 조선처럼 제후국으로 삼아달라는 애걸”의 용도를 어렵지 않게 읽었을 터인데,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화령으로 정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화령은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끼워 넣었을 테지만,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역사를 통째로 폐기하고  대륙세력에게 국호까지 받는 자들이 무슨 자존심이 있었을 것인가, 조선의 출발은 그토록 비굴하고 굴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를 기만했다. 스스로가 원하여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지만 왕의 묘호(廟號, 왕이 죽은 이후 신하들이 바치는 칭호)를 황제의 것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태조太祖의 칭호를 받은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후의 태종太宗과 세조世祖 등의 묘호를 사용한 것은 그냥 남길 일이 아니다. 종宗과 조祖는 오직 종주국의 황제가 받을 수 있는 극존의 칭호인데,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이 사용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고려가 왕건(王建, 877-943)을 태조로 칭하고 2대 혜종惠宗, 3대 정종定宗, 4대 광종光宗 등으로 칭할 수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자주적인 독립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후 25대 충렬忠烈王왕부터 왕으로 격하되고 충忠의 항렬을 사용하게 된 것은 몽골에게 패배한 이후 더 이상 황제의 묘호를 사용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굴복한 조선도 당연히 명나라에서 내려주는 시호諡號 이외에는 사용하지 말아야 했으며, 그럴 경우‘대왕’ 이상의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차라리 전쟁에 패배하여 왕으로 격하된 고려가 나아보일 지경이다. 고려를 멸망시킨 자들이 조금이라도 후손을 생각했었다면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라,

*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조선古朝鮮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영역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조선朝鮮이었으며, 조선의 수장이 단군이었다. 최초의 조선을 단군조선이라고 하는 것은, 최근의 조선을 이씨조선이라 부르고 것보다 훨씬 식민적사관이다. 최초의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단군조선이나 고조선으로 불렀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고조선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억지춘양으로 분류한 사대주의 사관에 의한 분류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 스스로 황제의 묘호를 받았던 조선의 왕 가운데 2대 정종(定宗, 1398-1400)은 그냥 왕으로 남아야 했다. 정종은 공정왕恭定王의 시호를 받았는데, 고려의 마지막 왕이 공양왕恭讓王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천대나 홀대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정종의 동생으로 정종 이후 즉위한 태종에 의한 의도적 격하의 결과였다. 전혀 실권이 없는데다 태조와 태종을 이어주는 바통baton이거나 징검다리의 기능 밖에 없었던 정종은 죽어서도 고려의 왕과 동일한 대접을 감내해야 했다. 정종이 공양왕의 딱지를 떼고 정종의 묘호를 받게 된 것은 숙종 7년(1681) 12월이었는데, 죽은 지 무려 262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때서나마 정식 묘호를 받게 된 정종의 심정은 어땠을까?  

덧붙이는 글 | 일단 <인터넷한겨레>에도 올릴 계획입니다.



태그:#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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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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