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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소박한 밥상에 항상 오르는 숭늉 한 그릇...
▲ 뜨끈뜨끈한 숭늉 한 그릇 우리 집 소박한 밥상에 항상 오르는 숭늉 한 그릇...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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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추운 겨울엔 구수한 숭늉 한 그릇이 최고다. 요즘 사람들은 '숭늉'이라는 단어를 알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숭늉은 소박한 밥상 끝에 매일 매식마다 오르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혹은 해가 질 무렵의 고샅 고샅에선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얗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엌 아궁이에선 마른 솔가지나 장작불이 활활 타올라 뿌연 수증기가 부엌 안에 가득했다.

밥을 다 짓고 나면 누룽지가 눌어붙은 가마솥에 하얀 쌀뜨물을 부어 아궁이에 불을 때고, 불기가 가시도록 오래 끓였다. 가마솥에서 오랫동안 팔팔 끓여 만든 숭늉의 자리는 소박한 밥상의 끝머리.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숭늉으로 갈무리를 했다. 엄마는 언제나 숭늉을 끓일 때, 한 가지 더 첨가하는 것이 있었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 쌀을 거둬들이고 나면, 맨 밑에 남았던 쌀 부스러기, 그 쌀 씨래기를 조금씩 숭늉 끓이는 솥에 넣어 끓이는 것이었다. 그 기똥차게 맛있는 숭늉 맛을 아직도 내 혀끝은 추억한다. 그때의 숭늉 맛은 그 시절 다른 추억들과 함께 내 정서를 형성시켰을 것이다. 아직도 그 추억의 숭늉 맛을 잊지 못한다.

요즘 들어 부쩍 아니 매일, 나는 우리집 소박한 밥상에 숭늉을 올린다. 이젠 숭늉 맛이 좋아 끼니 때마다 숭늉이 올라오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다. 겨울날 매일 식탁에 오르는 반찬이라야 김장배추김치와 시원한 무김치, 된장국과 구운 김 등이 거의 전부이지만, 별 다른 반찬이 없어도 숭늉 한 그릇으로 갈무리 하면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다.

예전엔 밥을 눌어붙지 않게 하려고 가스 불을 조절하느라 신경을 썼는데 요즘은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어 숭늉을 끓이기 위해 밥을 눌어붙게 하느라 불을 조금 늦게 끈다. 압력솥에 밥을 끓여서 보온밥솥에 밥을 덜어놓고 나면 솥 밑에 눌어붙은 누룽지, 그 위에 쌀뜨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불을 조금 줄여서 약한 불에 조금 더 끓이면 국물이 더 진하게 우러난다. 이렇게만 먹어도 숭늉은 구수하다.

그런데 숭늉 맛을 배가시키는 비법이 또 하나 있다. 올 겨울에 부모님께서 가루가 든 봉지를 갖다 주면서 '숭늉을 끓일 때 조금씩 넣고 끓여봐라 숭늉 맛이 다르다'고 했다. 이 가루는 쌀과 콩을 볶아서 만든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콩과 쌀을 섞어 만든 가루를 숭늉 끓일 때마다 넣고 끓였더니 정말 숭늉 맛이 더 고소하고 진한 것이 아주 좋았다. 이젠 습관적으로 가루를 넣고 숭늉을 끓인다.

숭늉이 없으면 밥을 다 먹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 정도로 숭늉은 우리집 소박한 식탁에 필수가 되었다. 숭늉은 역시 뜨겁게 먹는 것이 최고다. 뜨끈뜨끈한 숭늉이 속에 들어가면 뭉쳐 있던 마음도 몸도 풀리면서 온 몸의 피로마저 확 풀리는 듯하다. 출출할 때 먹으면 속이 든든해지는 것 같다. 숭늉 속에 든 눌어붙은 밥은 시원한 무김치와 잘 어울린다.

시원한 무김치와 눌어붙은 밥이 든 숭늉을 먹는 그 맛을 요즘 사람들은 알까 모를까. 옛날 사람들도 급조된 인스턴트식품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어쩌면 어릴 적에 먹었던 누룽지와 숭늉 맛을 모르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그 숭늉 맛은 내지 못할지라도 그 추억의 숭늉 맛을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숭늉을 끓인다. 소박한 밥상 위에 숭늉, 기름진 진수성찬이 어이 부러우랴. 겨울 내내 숭늉을 빠뜨리지 않고 식탁에 올릴 것 같다. 

"...언젠가 숭늉이 무엇이냐는 일본 출판사 측의 질문을 받고 진땀을 흘린 적이 있다. '한국에는 재미있는 속담이 하나 있지요. 성급한 사람의 행동을 보고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고 합니다. 숭늉 맛은 아무리 급해도 급조해 낼 수 없으니까요. 그것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마실 수 있는 물이지요.'...(중략)... 밥을 다 퍼내고 솥에 남은 찌꺼기를 헹구어 마신 숭늉, 그것은 최종단계에서 얻어지는 맛, 마지막 종지부 뒤에 나타난 한 토막 시구의 운율과도 같은 것이다...." - 이어령<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중


태그:#숭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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