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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관훈토론'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아온 관훈클럽이 오늘로 창립 52주년을 맞았다. 젊은 기자들이 친목도모와 언론연구를 위해 1957년 오늘(1월 11일) 창립한 관훈클럽은 이제 회원 숫자만 900여명에 이르는 중견 언론인 단체로 성장했다. 또한 창립 이후 신문의 날 제정, 신문윤리강령 제정 등 '언론사(言論史)'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관훈클럽 창립멤버 18명은 누구인가

1957년 4월 우이동 야유회에 참석한 관훈클럽 회원들
 1957년 4월 우이동 야유회에 참석한 관훈클럽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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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궁금했다. 관훈클럽을 최초로 만든 기자들은 누구였을까. 또 몇 명이었을까.

네이버 백과사전을 '두드리니' 18명이란 숫자가 나왔다. 헌데 얼마 전 읽었던 <조선일보 사람들> 때문에 꼬이기 시작했다. 그 책에는 관훈클럽 태동 과정을 설명하면서 "관훈동 한 하숙집에서 최병우와 박권상을 포함한 젊은 기자 14명이 모여 조촐하게 출발했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관훈클럽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18명이란다. 허나 <조선일보 사람들> 덕분에 한 번 싹튼 의구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주요 멤버 이름만 나와 있을 뿐, 전체 18명이 누구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관훈 50년사' PDF 파일 역시 다운로드 실패. 답답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관훈클럽 홈페이지에서만은 18명의 프로필을 정확하게 알 수 있으리란 것이 상식적인 '기대'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홈페이지를 통해 스스로 밝히듯 "언론인들의 자발적인 작은 모임으로 출발하여 한국의 가장 권위 있는 언론단체로 성장한 관훈클럽은 세계적으로도 독특하고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열여덟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관훈클럽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라 자처하는 곳 아닌가.

교보문고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이름들

그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곳은 교보문고였다. 한 프리랜스 작가(정범준)가 쓴 '이야기 관훈클럽'을 통해서였다. 그는 "젊은 기자들은 마침내 관훈클럽 발족을 선언하고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1957년 1월 11일 관훈동 하숙집에서였다"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관훈클럽의 역사적 출발이었고 이날은 훗날 클럽 창립일로 자리매김된다. 참석자는 모두 열네 명으로 김보성, 김용구, 김인호, 박권상, 박중희, 이경성, 이규현, 이시호, 이정석, 정인양, 조세형, 진철수, 최병우, 홍성원이었다. 나흘 후인 15일에는 열세 명이 또 모였다.

참석자는 김보성, 김용구, 김인호, 노희엽, 민병규, 박권상, 박중희, 이광표, 이시호, 임방현, 정인양, 진철수, 홍성원이었다. 이날 창립 멤버가 결정됐다. 발기인 총회에 참석했다가 15일 회의에는 불참한 이경성, 이규현, 이정석, 조세형, 최병우 다섯 명과 이날 모인 열세 명을 합쳐 열여덟 명을 창립 멤버로 정한 것이다."

창립일인 오늘(1월 11일) 홈페이지. 아무 '이상' 없다
 창립일인 오늘(1월 11일) 홈페이지. 아무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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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은 여전히 '오리무중'... 정주영 회장 동생 정신영도 마찬가지

<조선일보 사람들>의 '오보'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기록을 참조했는지 몰라도 11일 참석자만을 창립멤버로 오인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는 18명의 프로필을 확인할 차례였다. 다시 관훈클럽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회원 명단을 검색하면 이들의 간단한 이력 정도는 확인할 수 있으리라 '또 한 번' 기대했다.

'또 한 번'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현재 생존자만 확인할 수 있었다. '타계회원 검색' 메뉴를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사망자 검색률 '제로'였다. 관훈클럽 '산파'로 평가받는 최병우는 물론, 김보성, 김인호, 노희엽, 이경성, 이규현, 이시호, 이정석, 홍성원 등 9명의 간단한 프로필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관훈클럽 홈페이지에서도 창립멤버는 '구경'도 하기 어려운 셈이다.

초창기 멤버인 정신영의 이름도 검색되지 않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정신영은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독일에서 근무하다 1962년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정 회장이 1977년에 1억원이란 거액을 관훈클럽에 희사했다. 현재의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이다. 2007년 신영연구기금 창립 30주년 행사에 정몽준 의원이 참석했던 것도 이런 혈연에서였다.

지난 2007년 11월 5일에 열린 관훈토론회에 참석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난 2007년 11월 5일에 열린 관훈토론회에 참석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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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이처럼 관훈클럽 홈페이지에서는 "대한민국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란 말이 무색했다. 심지어 오늘(1월 11일)이 관훈클럽 창립일이란 사실조차 홈페이지를 통해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 흔한 '팝업'도 뜨지 않았고, 변변한 공지 하나 없었다. 관훈클럽 50년사 동영상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나라가 어지럽고 살기 어려웠던 1950년대, 관훈동 작은 하숙집, 암울했던 언론 상황에서 언론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곳에 모여 토론하던 젊은 기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한국 언론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관훈클럽은 탄생했다."

왜 언론계 일각에서 "현재 언론계에 대한 기여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관훈토론회 외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관훈클럽의 '핵심'은 '무슨 무슨' 실적이 아니다. 1957년 작은 하숙집에서 관훈클럽을 만들었던 젊은 기자들의 '언론을 사랑했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창립 52주년을 맞는 오늘, 관훈클럽 홈페이지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야 관훈클럽을 어떻게 '대한민국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로 볼 것인가. 그보다는 차라리 '대한민국 언론의 잊혀지는 역사'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버전'은 blog.ohmynews.com/bangzza. 창립멤버 프로필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관훈클럽, #관훈토론, #최병우, #박권상,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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