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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앉아서 차를 달여 매계(梅溪)에게 받들어 올리다"

 

고층아파트와 전원주택, 빌라들이 "쿵쾅"거리며 계속 들어서고 있는 인천 서구 검암동 검암2지구의 허암산 기슭에는 작은 샘터가 하나 있습니다. 계양산에서 뻗어나온 아담한 산줄기와 숲 그속의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마을과 논, 밭이 택지개발이란 이름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파괴된 허암산은, 그 아픔과 고통의 눈물을 샘물에 담아 삭막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덮힌 산아래로 흘려보냅니다.

 

 

 

 

그렇게 흘린 눈물은 땅을 적시고 밭과 논을 채워 새로운 생명을 소생하게 하지 못하고, 실개울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시멘트 배수로를 따라 가다 매말라 버립니다. 그래서 낯설게 변해버린 그 마을에서는 흔하디 흔했던 개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개울은 논두렁을 지나 '녹색뉴딜'이란 거짓으로 포장해 '경인운하'로 둔갑시킨 굴포천으로 흘러들어 서해로 흘러갔지만 지금은 물길이 죄다 막혀 그러지 못합니다. 정부가 '4대강물길잇기'를 위해 국민혈세를 퍼붓고 있지만, 정작 큰 물길을 맑게하고 생명이 깃들게하는 소소한 물길들은 되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기본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달을 좇지 않는 강직하고 샘물처럼 맑은 이들은 어디있나?

 

그 샘터의 이름은 바로 허암차(虛庵茶)샘입니다. 허암차샘 위로는 연산조의 문신인 정희량이 은거하던 옛집터(암자)가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그곳을 사람들은 허암지(虛庵地)라 합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지자체에서는 이곳으로 오르는 길목을 정비해 놓고 푯말도 세워놓았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희량의 호가 허암이라 해서 산이름도 허암산이라 한 것이라 합니다.

 

정희량은 본관은 해주, 자는 수부, 호는 허암, 철원부사 연경으 아들로 1469년(예종) 서울에서 태어났다 합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해 20세에 초시과거인 생원에 장원하여 벼슬을 시작했는데 높은 절개를 지켜 나쁜 사람과는 같이 있거나 말하는 것조차 싫어하였다 합니다. 글도 잘 지어 명성을 날렸고 특히 역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성종이 죽자 허암은 복을 입고 성균관 유생들을 거느리고 '성종을 위하여 불사를 한다'고 글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이 문제가 되어 귀양보내졌다가 풀려났고, 1487년 예문관 대교가 되어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아 경연에 근면할 것 등 열가지 소를 올린 바도 있다 합니다. 요즘 '나쁜' 정치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직하고 의로운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무오사화 때 사초문제로 윤필상 등에 의해 신용개, 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고 의주에 이배되었다 다시 김해로 이배되었는데 그 당시 어머니가 상을 당했지만, 유배중인 그는 죄인이라 집에 가지 못했다 합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 고양에 있는 어머니 묘에 들른 뒤 다음 집이 빈틈을 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종적을 알 수 없었고 한강 백사장에 그의 신 두짝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지만, 그 때 그는 부평땅 서곶 검암동 허암산에 은거했다 합니다. 폭군인 연산군에게 알려지만 불리할 것 같아 스스로 행방불명이 된 것이라더군요. 총민박학하고 문예에 조예가 있지만, 영달에 마음이 없던 그가 은거하던 그 곳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봤습니다.

 

"해저믄 강상에 찬물결 절로 이는데 쪽배는 이미 강가에 대어 있으되 밤사이 풍랑은 사납겠구나."

"새는 무너진 담구멍으로 보고 중운 석양에 샘물을 길네. 산과 물을 집으로 삼는 손님의 천지는 어디가 끝인고."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허암지, #허암차샘, #샘터, #검암동, #경인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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