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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 가다

 

나는 학교에서 정년퇴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애초의 내 생각과는 달리 조기퇴직을 하고 5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원 산골마을로 내려왔다. 내가 사는 마을은 세 집밖에 살지 않는 외딴 동네로 특히 겨울철에는 적적하기 그지없다. 최근에는 아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이들과 지내는 날이 잦아 나 혼자 지내는 때가 많다. 다행히 올 겨울은 밀린 원고가 있었기에 정월초하루 아침까지 무료한 줄 모르게 지냈다.

 

어제 아침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던 원고를 탈고하고 나니 곧 어딘가 텅 빈 듯한 허전함과 고적감이 엄습했다. 이럴 때는 기분 전환으로 영화라도 한 편 보거나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 맥주라도 한 잔 마시면 텅 빈 마음을 채울 수도 있으련만, 이 겨울 산골마을에서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오늘 오전 내내 책을 뒤적거리기도, 음악을 듣기도 하다가 뒤늦게 점심을 챙겨 먹고는 산책을 겸하여 전재 너머 코레스코 목욕탕으로 갔다. 산마을 생활 가운데 가장 즐거운 일이랄까, 스트레스를 푸는 일은 목욕탕에 가는 일이다. 아내와 같이 갈 때는 승용차를 타고 가지만, 혼자 갈 때는 집에서 장터마을까지 2킬로미터 조금 안 된 길을 15분여 걸어서 간다. 그런 다음 거기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전재를 넘어 코레스코콘도 앞에 내려 지하 목욕탕에 간다. 

 

5년 동안 줄곧 이삼일에 한 번은 목욕탕을 들리자 이제는 주인도 알고는 매우 반겨 맞는다. 매번 1회용 샴푸나 면도기를 거저 주거나 커피를 타 주는 등, 대접이 융숭하다.

 

날씨가 차기에 옷을 단단히 차려입는다고 미적거리다가 차 시간이 촉박하게 집을 나섰다. 이런 날은 곧장 장터마을 정류장으로 가지 않고 곧장 안흥중고등학교 앞 삼거리로 간다. 내 예상과 같이 삼거리에 이르자 막 버스가 왔다. 손을 들어 세운 뒤 버스에 오르자 기사 혼자 타고 있었다.

 

매번 버스를 탈 때마다 느낀 바이지만 시골버스에는 손님이 매우 적다. 버스기사의 말로는 손님이 없어 적자이지만 지자체의 요청으로 운행을 하는데, 적자 분은 지자체 예산으로 메워준다고 했다.

 

산골마을에도 이즈음은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에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쩌다가 걸어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혼자 사시는 노인들이거나 아이들이고 나머지는 죄다 승용차나 트럭, 아니면 경운기라도 타고 다닌다. 

 

그러다보니 이제 시골 길조차도 보행을 위한 길이 아니라 차를 위한 길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한번은 내 집에서 코레스코 목욕탕까지 이십 리 길을 운동 삼아 걸어 전재 고개를 넘었더니 자동차들이 어찌나 싱싱 달리는지 매우 위험해서 그 다음부터는 걸어 다닐 생각을 접게 되었다.   

 

공허한 메아리

 

지하 600미터에서 솟는 유리처럼 맑고 따뜻한 물로 몸을 닦고는 기분 좋게 인삼탕(온탕)에서 잠시 즐긴 뒤 옷을 입고자 목욕탕 탈의실로 나오니 주인이 새해 덕담과 커피를 한 잔 타 주었다. 돌아가는 버스시간이 다소 여유가 있기에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이 대통령의 신정 국정연설이 재방영되고 있었다.

 

… 저는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 단호히 처리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히고 싶습니다. 공직 사회를 비롯해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부정과 비리를 제거하겠습니다. 또한 서민을 괴롭히는 폭력이나 범죄에 대해서는 끝까지 추적하여 엄단할 것입니다.

 

법치를 바로 세워 선진일류국가로 가는 기반을 다질 것입니다. 법치와 함께 꼭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과 윤리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의식 개혁입니다. 도덕은 강한 나라를 만드는 뿌리입니다.  …

 

대통령의 말씀이 마치 조금 전 타고 온 버스에 혼자 탄 운전기사처럼 공허하게 들렸다. 사실 사람의 말이란 하는 사람에 따라 소음이거나 공해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인들의 말은 더욱 그러하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그것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요, 공해다.

 

어떤 전직 대통령은 집권할 때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으며 정당 이름조차도 '민주정의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퇴임 뒤 수천억 원의 비자금이 쏟아졌을 때 많은 백성들은 한동안 입을 닫지 못하였다. 사실 그가 집권할 때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칼자루를 얼마나 휘둘렀는가. 숱한 사람들이 부패 무능 인물로 그 잔치에 제물이 되었다. 심지어는 교실에까지도 '학급정화위원회'를 만들어 비리를 사제 간, 학생 간 서로 고발케 하고는 학급정화일지까지 쓰게 했다.

 

커피를 다 마신 다음 수첩을 꺼내 버스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정류장으로 내려가는데 버스가 휙 지나갔다. 손을 들어 '스톱'이라고 고함쳤으나 그야말로 '버스 지난 뒤 손들기'였다. 다음 버스시간까지는 정확히 1시간 11분을 기다려야 한다. 순간 낭패감에 내가 미워졌다. 남들이 다 갖는 운전면허증도 없이 나는 왜 이 산골에서 핫바지로 살아가는가.

 

사실 내가 운전면허증을 따지 않은 것은 1980년대 말 어느 해 전기 대학 입학시험 날에 자가용들이 길을 메워 교통체증으로 입시장에 지각해서 시험을 잡치고 이튿날 등교해서 울고 있는 한 제자를 보고서 자동차 문화에 분노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래서 '자가용 병'이라는 글을 썼고, 그 글을 1988년 나의 첫 작품집 <비어 있는 자리>에 수록했다.

 

… 자가용들이 수험생을 태워다 주고 바로 빠진다면 좋으련만, 입시장 옆 대로변이나 골목길에 주차시키고선 부모들이 차안을 대기실로 이용하기 때문에 교통 정체는 더욱 가중되고 있다. … 학생들의 휴식 터인 등나무 그늘이 교사들의 주차장으로 전용되고 있다. 사업상 승용차가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단지 출퇴근만을 위하여 이 좁은 도시 도로에서 자가용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무시하는 처사요, 남이야 어떻든 말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주의자요, 교사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안일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

 

나는 이 글로 몇 동료에게 시대착오적인 글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도 곧 승용차를 몰고 타고 다닐 거라고 두고 보자며 빈정거렸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현직에 있는 한 절대 승용차를 몰고 다니지 않겠다고. 현직을 떠난 지 만 5년이 지나도 나는 여태 운전면허증이 없다.

 

사실 승용차는 도시보다 외진 시골에서 더 필요하다. 아내는 자기가 아파도 내가 승용차로 병원에 데려다 주지도 못할 거라고, 현직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운전을 배우라고 권하지만 그러겠다고 대답은 하고도 여태 배우지 않고 있다. 20년 전에 내가 쓴 글을 스스로 뒤집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버스를 놓치다

 

점차 글쓰기가 힘들다. 말이나 글을 함부로 내뱉고는 제 글에 제 말에 휘둘려 망신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중국 모택동 주석은 그의 아들을 한국전에 참전시켜 잃었다. 아들의 시신조차도 북한 땅에 묻었다고 한다. 주한 유엔군사령관 밴 프리트 대장의 아들도 한국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퇴임 후에도 그들 인민이나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숱한 말과 글들을 보았다. '정직' '양심' '진리' … 학생들 앞에서는 자신만이 그렇게 살아온 양,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슬그머니 그 반대되는 일에 앞장 선 한 얼굴 두꺼운 교장을 보고, 또 그런 일에 앞장서서 말려야 할 '참 교육'을 부르짖던 앳된 젊은 교사조차도 아무런 고민없이 그런 비리에 동참하는 것을 보고, 나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온 것을 뒤늦게 깨달아 교단을 떠나 이 산골로 내려왔다.

 

얼마 전에도 보니까 교단에서 자기 신념대로 행동한 이에게 돌팔매질을 한 보도를 보았다. … … … 처절한 자기희생이나 솔선수범, 언행일치가 아니고서는 말과 글로 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힘이 든다고 한다.

 

버스가 힁하니 지나간 길가 정류장에서 오들오들 떨며 지나가는 차에게 손을 들었으나 못 본 체 싱싱 지나쳤다.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가 텔레비전을 보며 한 시간을 기다려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돌아서려는데 봉고 차 한 대가 10여 미터 가다가 멎었다.

 

"어디까지 갑니까?"

"안흥까지 갑니다."

"어서 타세요."

"고맙습니다."

"버스를 놓치셨나 보지요?"

"네, 그렇습니다."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세상살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재 고개를 넘었다.

 

운전사는 내가 사는 마을을 묻고는 집까지 데려다 주려는데 굳이 안흥 장터마을에서 내렸다. 예정에 없던 이발까지하자 그새 어둑해졌다. 기온이 떨어져 알알한 밤공기를 마시며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 버스를 놓쳐 재수가 없다가도 그나마 봉고 차를 얻어 타 재수 좋은 날이었다. 길에서 오들오들 떨지도 않았을 뿐더러 차비까지 아꼈으니….


태그:#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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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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