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맴섬은 두 섬 사이 열린 공간으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해돋이로 이름 높은 곳이다
▲ 맴섬 맴섬은 두 섬 사이 열린 공간으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해돋이로 이름 높은 곳이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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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시 버리고 억울한 삶 깨치려 땅끝에 왔네
끝과 시작을 여닫는 바닷가에 서서
보길도 보고도 고산 모르는 가슴 없는 사람들 바라보며
고정희 김남주 생가에서 사진만 찍는 눈 먼 사람들 바라보며
그대 품기 위해 반역의 눈 두리번거리네
세상은 백내장 걸려 흐릿하네
여기 저기 마음 썪는 내음 지독하지만
사람들은 아이 좋아 아이 좋아 몸 둘 바 모르네
해남 들 가로질러 보길도로 부는 바람에
눈 다시 씻고 눈 다시 크게 뜨네
안 보여, 당달봉사 된 것 같아
참은 죽고 거짓만 월출산 바위처럼 촘촘촘 박혀
시는 스러지고 시인들만 조개껍데기처럼 널브러져
보길도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파도에
나이스 큐! 오마이 갓! 즐거운 비명 지르네
참 시 주우러 새 삶 주우러 땅끝에 왔다가
그 초심마저 갯바위 속에 유배되고 말았네
만나는 사람 모두가 시인인 나라
방방곡곡 시들이 병신춤 추는 나라
그 나라에 시가 없다네
그 나라에 희망이 없다네
세상살이 아파 가슴에 서러운 핏물 솟구쳐
해질 무렵 방파제에 쪼그리고 앉아
묵은지 안주 삼아 막걸리 씹어 마시네
젓갈 안주 삼아 조선을 갈아 마시네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잊고 씻고 싶네
세상 잊고 나 잊고 시 씻고 시인 씻어낸 그 자리
비로소 조선이 참 싹 틔우고
이제야 시가 참 싹 틔울 수 있지 않겠나
바람 센 땅끝마을에 서서 막걸리에 까빡 취해 그대 부르네
시여, 세상이여
그대 꼬리 붙들고 까부는 사람들 용서 좀 하시게나

-이소리, '땅끝마을에 서서' 모두

"으째야 쓰까, 으째야 쓰까이~"
"아, 그 서슬 퍼런 총칼 앞에서도 거시기처럼 살아남은 우린디, 이깟 몇 년을 못 버틴당가. 지깐 기 지 아무리 깝쭉대도 인자 4년빼끼 안 남았잖은가."
"우짜모 좋것노, 우째야 살것노~"
"그라이 그때 내가 뭐라 카더노. 그 넘들이 한나라 말아먹을 당이라 안 카더나. 내 같으모 손가락을 똑 뿔라뿌고 말 것다."

끝과 시작을 썰물로 또르르 말았다 이내 밀물로 쏴아아 펼치고 있는 땅끝마을. 한반도 땅끝으로 수평선을 등에 짊어진 파도가 기축년 새날처럼 밀려온다. 짙푸른 바다 위를 쟁기 끄는 소처럼 음메에~ 소리를 내며 뚜벅뚜벅 힘차게 걸어오는 파도를 가슴에 끌어안는다. 2008 한 해 내내 화병처럼 막혔던 숨통이 갑자기 확 트인다.

속 시원함도 잠시. 땅끝마을 방파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2009 수평선을 부려놓은 파도가 다시 2008 이 세상 시름을 몽땅 등에 짊어지는 순간 갑자기 뚫렸던 가슴이 턱 막힌다. 2008 한 해 시름이 얼마나 많고 무거웠으면 저 파도마저 기우뚱 기우뚱 뒷걸음질 치다 그만 맴섬에서 뒤로 나자빠지고 마는 것인가.

방파제 곳곳에 고깃배가 일렬로 줄을 서 있다
▲ 땅끝마을 방파제 곳곳에 고깃배가 일렬로 줄을 서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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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오른 편에는 고산 윤선도 숨결이 묻어 있는 보길도와 점점이 박힌 여러 섬을 잇는 유람선이 드나들고 있다
▲ 땅끝마을 방파제 오른 편에는 고산 윤선도 숨결이 묻어 있는 보길도와 점점이 박힌 여러 섬을 잇는 유람선이 드나들고 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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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파도마저 시름에 겨워 울고 있다

땅끝마을 파도가 2008 시름에 깔린 자리, 목 쉰 전라도 사람들 목소리가 환청처럼 수런수런 들려오기 시작한다. '으째야 쓰까, 으째야 쓰까이~ 소값, 농수산물 값은 길거리 나도는 똥개 값보다 못하고, 생필품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고만 있으니 이를 으째야 쓰까. 거시기 겉은 세상, 확 뒤집어 엎어야 쓰까이~'. 

땅끝마을 파도가 애써 일어서려는 자리, 억센 경상도 사람들 목소리도 꿈속처럼 아스라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우짜모 좋것노, 우째야 살것노~ 같은 지역 출신이라꼬, 지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만 하모 가난한 서민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 수 있게 해준다 캐서, 가족들 몽땅 다 찍어 줏더마는 이기 머슨 난리고. 인자 우째야 살 것노'.

땅끝마을 파도가 맴섬 주변에 자빠져 울고 있다. 파도가 저 수평선 너머에서 새로운 해를 짊어지고 왔으나, 지는 해가 새로운 해를 더욱 어둡게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다. 경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2009 새해는 2008년보다 더욱 어려울 것이며, 진짜 경제공황은 2009년부터라고 침이 마르게 떠들고 있다.

서글프다. 시름에 겨웠던 헌 날을 몽땅 내버리고 희망 찬 새 날을 찾으러 땅끝에 왔던 나그네. 나그네가 바라보는 파도가 시름에 겨워 아우성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파도소리에서 FTA에 허덕이는 농어민을 포함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서민들 힘겨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난 맴섬과 형제바위가 마치 오랜 불황 때문에 바지마저 잃어버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듯하다
▲ 맴섬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난 맴섬과 형제바위가 마치 오랜 불황 때문에 바지마저 잃어버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듯하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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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섬이 '맴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맴섬 이 두 섬이 '맴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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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까지 밀려 들어온 거대한 도시문명이 낳은 잔해

12월 끝자락. 그 지루하고 어두웠던 해를 어서 쫓아내고 밝은 해를 가슴에 꼬옥 품기 위해 사구미 금빛 모래밭에 2008 발자국을 콕콕콕 찍어둔 채 땅끝마을로 간다. 푸르른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겨울햇살이 꽤 차갑다. 가끔 메마른 들녘을 스치는 바람이 나그네 마음에 찌들어 있는 오랜 티끌을 풀썩풀썩 일으키는 것만 같다.  

땅끝마을로 들어선다. 땅끝마을은 나그네가 1990년대부터 역사기행, 문학기행 등을 열면서 여러 차례 다녀간 곳이다. 하지만 예전에 보던 고즈넉한 농어촌 내음이 물씬 풍기는 그 살가운 마을이 아니다. 지금 이 마을 들머리 곳곳에는 모텔과 민박, 술집, 가요주점, 횟집 등이 휘황찬란한 도시옷을 입고 지나치는 손님을 희롱하고 있다.

거대한 도시문명이 낳은 잔해가 이곳까지 들어와 있다니. 눈에 몹시 거슬린다. 하지만 어쩌랴. 사람 가는 곳을 골라 기를 쓰고 따라 다니는 것이 자본주의가 낳은 상술 아니겠는가. 그래. 자본주의가 한반도 땅끝이라고 해서 어찌 비껴 가겠는가. 오히려 사람 많이 몰리는 땅끝이라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땅끝마을에 내려선다. 저만치 맴섬과 형제바위가 이 마을 상징처럼 오도카니 엎드려 있다. 맴섬 왼 편에는 긴 방파제가 마치 사람이 만든 딱딱한 인조 수평선처럼 드러누워 있고, 그 방파제 곳곳에 고깃배가 일렬로 줄을 서 있다. 방파제 오른 편에는 고산 윤선도 숨결이 묻어 있는 보길도와 점점이 박힌 여러 섬을 잇는 유람선이 드나들고 있다.  

사자봉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독특한 사람 얼굴 모습을 띠고 있는 바위 두 개가 있다
▲ 형제바위 사자봉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독특한 사람 얼굴 모습을 띠고 있는 바위 두 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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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불황에 바지마저 잃어버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듯한 맴섬과 형제바위

땅끝 바다를 향해 쭈욱 달려나간 방파제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저만치 100여m 앞에 땅끝 등대가 제 홀로 서서 수평선을 톡톡 튕기며 짙푸른 하늘을 여유롭게 날고 있는 갈매기를 부르고 있다. 아담한 키로 서 있는 땅끝 등대에는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낙서가 마치 엉긴 그물처럼 빼곡하게 적혀 있다.

어지럽다. 땅끝 등대를 뒤로 하고 다시 맴섬과 형제바위 앞에 선다.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난 맴섬과 형제바위가 마치 오랜 불황 때문에 바지마저 잃어버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듯하다. 맴섬은 두 섬 사이 열린 공간으로 떠오르는 아름다운 해돋이로 이름 높은 곳이다. 하지만 왜 이 두 섬이 '맴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맴섬 오른 편, 땅끝 전망대가 우뚝 서 있는 사자봉을 밑그림으로 삼고 있는 독특한 사람 얼굴 모습을 띠고 있는 바위 두 개가 있다. 형제바위다. 하지만 나그네 눈에는 형제바위가 아니라 모녀바위처럼 살갑게 보인다. 마치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과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어부 아내와 그 딸 같다.

맴섬과 형제바위를 지나 땅끝 전망대가 있는 갈두산 사자봉으로 거슬러 오른다. 땅끝 전망대(입장료 1천 원)로 가는 길은 세 가지다. 하나는  땅끝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약 30분쯤 걸어가는 길이다. 또 하나는 차를 타고 전망대 바로 밑에 주차장에 내려 올라가는 길이다. 나머지 하나는 땅끝 모노레일(왕복 7천 원)을 타고 가는 길이다. 

나그네 눈에는 형제바위가 아니라 모녀바위처럼 살갑게 보인다
▲ 형제바위 나그네 눈에는 형제바위가 아니라 모녀바위처럼 살갑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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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두', 칡이 많아서 '칡머리' 혹은 사자봉이 '칡' 닮아

"땅끝마을은 토말, 갈두마을이라고도 한다. 북위 34°17'38"에 위치한다. 해남읍 남쪽 43.5km 지점인 이곳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南陽面) 풍서동(豊西洞) 유원진(柔遠鎭, 북위 43°0'39")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이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룬다.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땅끝의 해남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극북의 온성까지 2000리를 헤아려, 이로부터 '3000리 강산'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안내자료 '몇 토막'

나그네는 전망대 주차장 슈퍼에서 막걸리로 목을 가볍게 축인 뒤 수풀 사이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전망대(15분)로 걸어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그 오솔길 사이로 짙푸르게 파도치는 그 아름다운 땅끝 바다, 시작과 끝이 더불어 사는 그 신비스런 바다를 어찌 놓칠 수 있으랴. 비록 숨이 좀 가쁘긴 하지만.

눈 시리도록 빛나는 땅끝 바다를 바라보며 땅끝마을을 차분하게 되짚어본다. 땅끝마을은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마을에 있는 한반도 최남단 마을(1986년 국민관광지 지정)이다. 이 마을 이름인 갈두리(칡 머리)에 얽힌 이야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곳에 칡이 많아서 '갈두'라 이름 지었다는 설과 사자봉 모습이 칡을 닮아 '갈두'라 불렀다는 설이다.

안내자료에는 "갈두는 예전부터 제주도로 통하는 중요한 뱃길이었으며 제주도에서 군마를 싣고 와 육지로 보내는 항로였다"고 나와 있다. 이와 함께 "땅끝에 솟은 사자봉(獅子峰, 122m) 아래와 갈두마을 주민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생활을 한다"고 적혀 있다. 날씨가 맑은 날, 이 마을 사자봉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도 한라산이 가까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땅끝 전망대(입장료 1천 원)로 가는 길은 세 가지다
▲ 멀리 전망대가 보인다 땅끝 전망대(입장료 1천 원)로 가는 길은 세 가지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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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는 전망대 주차장 슈퍼에서 막걸리로 목을 가볍게 축인 뒤 수풀 사이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전망대(15분)로 걸어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 전망대 가는 길 나그네는 전망대 주차장 슈퍼에서 막걸리로 목을 가볍게 축인 뒤 수풀 사이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전망대(15분)로 걸어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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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밀려오는 파도 위에 성명서를 쓴다

사자봉 전망대에 다다르자 저만치 짙푸른 바다에 보석처럼 콕콕콕 박혀 있는 흑일도와 백일도, 노화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아래 남해로 내민 사자봉 벼랑에는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봉이니라. 우리의 조상들이 이름하여 땅끝, 또는 토말이라 하였고…"라고 새긴 토말비(1981년)가 지키미처럼 우뚝 서 있다.

사자봉에 서서 끝 간 곳 없이 짙푸르게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나자 2008 한 해 내내 꽉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인다. 그래.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게 뭐 있겠는가. 이제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어디 있는가. 소띠 해인 2009년에는 더 이상 돈가뭄에 시달리지 말자. 더 이상 '소귀에 경 읽기'하는 이 정부에 흔들리지도 말자.

사자봉으로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 위에 이명박 정부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쓴다. 1980년대 하루가 멀다시피 하고 쓴 그 성명서. 성명서를 쓴 파도가 사자봉에 벼랑에 부딪쳐 하얀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나면 또 달려오는 파도 위에 쓴다. 이윽고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가 모두 성명이 되어 소리치기 시작한다.

'민간독재 이명박 정권은 반민주 질주를 당장 멈추라!'고. '경제살리기 구호를 내세우면서도 특정 세력 이익을 대변하는 사익추구 집단 정치를 당장 멈추라'고. '국민여론 반대에도 불구하고 언론관계법과 한미FTA 비준 강행처리, 반민주악법이 수두룩하게 들어 있는 85개 '민생법안'(?)을 당장 그만두라'고.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천안-논산천안고속도로-광주-나주-해남읍 13번 국도-완도 방면 20km-땅끝마을 표지판 1번 국도 11.4km-송지면-813번 지방도 9km-땅끝마을
*해남터미널에서 땅끝마을로 가는 직행버스(1시간)를 타도 되며, 군내 완행버스를 타면 김남주 생가(삼산면 봉학리), 고정희 생가(삼산면 송정리), 허준유배지(송지면 중리), 송호해수욕장(송지면 송호리) 등지를 둘러본 뒤 다시 땅끝마을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땅끝마을, #갈두리, #맴섬, #형제바위,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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