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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숨 나오는 손 때를 보고 결심하다

 

아이들에게 묻은 손 때는 때론 아름답게 보이지만, 때론 감당이 안 될 때도 많았다. 특히 난잡하기 이를 때가 없는 교실들을 마주할 때마다 한 숨이 푹푹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생수는 200명이 채 안되지만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왕리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모여있는 이 곳은 곳곳에서 한 숨이 절로 나올만한 손 때 묻은 벽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페인팅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 선생님들과 원할한 대화가 어려우니, 이미 다른 지역에서 진행했던 페인트 칠을 바탕으로 간단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선생님들 반응은 예상 밖으로 좋았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페인팅을 감행(?)하게 됐다.

 

 

목표는? 모두가 함께 '관계'에 대해 페인팅을 하는 것!

 

"봉사활동, 봉사자는 그 곳에 있는 듯 없는 듯 해야한다. 설사 그 인력이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그 지역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전과 같이 잘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문제를 인식하여 일을 진행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은 라온아띠 해외봉사단의 기획 및 교육에 참여했던 이선재 UNESCO 청소년 팀장이 국내교육 중에 우리에게 들려줬던 말이다.

 

이제와서야 그 말의 갈피를 잡기 시작하며 우린 페인트 작업을 그런 형태에 맞추어 진행해보기로 했다.

 

일단 공간의 디자인에 경우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고, 페인트 칠의 경우 공간을 사용하는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청년들 위주로 마을 사람들이 함께 페인트 칠에 참가하여 과정을 모두 본 뒤 아이들의 시각적인 환경이 변하는 것, 그리고 함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에 대해 상호 몸소 체험하는 것을 기대효과로 잡았다. 이 페인팅의 주제 역시 우리팀의 목적인 '관계'였다.

 

"왜 이리 일을 크게 벌리냐, 돈은 어쩔거고?", 하지만 모든게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일단 디자인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참여하긴 했다. 하지만 페인팅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세밀하거나, 죄다 농사짓는 그림밖에 없었다. 농사는 이미 페인팅이 되어 있었고, 굳이 그리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일상생활이었다(결국, 수정보완해서 12월말 진행예정이다).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마을 청년들은 어디에 갔으며, 선생님들은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의 진정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거들다가 말다가를 반복하고, 아이들은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페인트를 가지고 이곳저곳에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일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한데 팀원들이 입을 삐죽거리며 페인트 냄새로 뒤덮힌 2학년 교실에 들어왔다.

 

"페인팅하는거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리냐고 뭐라고 하고, 예산도 만만치 않다고 선생님들이 우리 불러다놓고 뭐라고 그래!"

 

갈수록 첩첩 산중이었다.

 

"마무리 해야죠?"

 

방향추를 잡을 시간이 다가왔다. 페인팅 하는 것이야 이전에 합의됐던 것인데 아이들을 통제해주기로 약속했던 선생님들이 두 손 놓고 있으니 반경이 커진 것, 선생님들이 동의했다. 예산은 원래 '라온아띠' 봉사단의 예산으로 지원하기로 합의하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준비하고 얘기한게 얼만큼인데, 왜 이렇게 됐죠? 우리 이제 그만 마무리 해요!"

 

그러자 다들 우리를 쳐다본다. 결국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10시간 이상 강도 높은 페인팅이 시작됐다. 몸이 힘든건 둘째 치고 수도 없이 벌어진 공간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4일간 페인트만 칠했는데 지치질 않았다

 

결국, 모든 사람들과 이래저래 이야기해본 뒤 하나씩 하나씩 처리하기로 했다. 가장 큰 공간부터 작은 공간의 순으로 페인트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 팀원 5명 정도가 내리 일해야 할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심어놓은 '관계'의 씨앗은 헛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우리의 모든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항상 아이들에게 무뚜뚝한 '고'에게 페인팅이 되는 부분마다 "쑤어이(아름답다는 태국말)"를 연발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쩌업'은 토요일 일요일을 반납하고 항상 나와 같이 아침 8시에 학교에 출근해서 저녁 먹을 나절에 페인트 냄새에 찌든 채 학교를 떠났고, 초등학교 1학년 '앤'은 페인트 붓을 기가막히게 빨았다. 중학교 3학년 '못'은 동네 청년은 아니지만 동네 친구들 한 무리를 데리고 와서 가장 기술적인 계단을 칠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초등학교 4학년 '캉'은 하루종일 페인트 통만 들고 우리 옆에 서있었다. 그밖에 수많은 아이들이 '두레(관계를 고민하며 가르친 단어, 하지만 단지 도와주는 것이라고 사고하는 것 같음)'라고 외치며 내 손을 붙잡아줬다.

 

4일동안 자는 시간 빼고 페인트만 칠했는데 지치지가 않았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평가는 냉정했지만, 따뜻해지는 가슴이란 다음날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토악질을 해댔다. 페인트 냄새에 이미 속이 뒤집힌 탓이었다.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애꿎은 속 탓을 해대며 물을 마시고 있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 단체로 몰려와서 말한다.

 

 

"피고, 2학년 교실이랑 우리 교실이랑 바꿔주면 안되요?"

 

2학년 교실에 도착하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벽에 써있는 한국어를 떠듬떠듬 읽으며 날 보자마자 '사랑해요'란다. 그 다음에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 시작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그 속에 우리.

 

애초에 목표했던 것에서 많은 것이 이탈되고, 떨어져 나갔음에 평가는 일정부분 냉정했지만 가슴이 따뜻하다. 우리가 한 페인팅이 예뻐서, 좋아서가 아니라 우릴 이해해서 우릴 치켜세우고 도와준 아이들과 내가 관계 있음이 한 없이 가슴 따뜻하다.

 

우리의 고군분투 페인팅은 이렇게 끝날줄 알았는데 한 선생님이 다가와서 이야기한다.

 

"고, 주말에 시간 있어요? 저쪽에 그림 하나 넣었으면 좋겠는데…."

 

'맙소사!'

덧붙이는 글 | KB-YMCA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태국 팀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태국 북부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태그:#라온아띠, #YMCA, #KB, #해외봉사, #페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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