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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과가 발표되던 날, 저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하수상하니 교사인 내가 할 일이 더 많아졌기 때문일까요? 어쨌거나 대선 이후, 전에 비해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더 깊어진 것만은 사실입니다. 내게 온 아이들만큼은 정직하게 키워 이 사회에 내보겠다는 그런 다짐 같은 거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할일이 더 많아졌다는 말, 그런 발상의 전환이 가능하군요. 대놓고 거짓말을 해도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참담했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결과가 슬펐는데. 더 처참하게 모욕을 당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비관하고 있었는데. 네. 할일이 많아졌습니다. 사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때가 되었나봅니다.

지난해 대선 직후, 인터넷 문학 카페에서 소설을 쓰는 한 지인과 나눈 대화이다. 그때 당시보다도 절망의 강도가 더 깊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지금도 다른 한 편의 희망에 기대어 서 있다. 역사를 되돌리려는 망종들이 날뛰는 세상에 희망 운운하는 것이 한가롭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희망이 절벽인 세상에서 비상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내게 희망은 아이들이다.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들이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그것을 금방 후회하고, 돌아서면 또 잔소리를 하고…. 이런 짜증스러운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나는 희망의 상상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이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것은 곧 교사인 나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일이다. 수업을 하다 말고 두 아이를 앞으로 불러냈다. 잠시 후 아이들은 차례대로 벽에 걸려 있는 거울 앞에 서서 마치 연극대사라도 외우듯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민수야, 나 민수야. 오늘 또 수업시간에 떠들다가 걸렸어.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안 그런다는 말 믿을 수 없다고?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 꼭이야. 그러니까 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마.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널 사랑해. 알지?”

내가 불러주는 대사를 아이가 따라하자 교실 여기저기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났다. 잠시 후 두 아이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그때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잦아졌다. 그렇게 1분 거울 퍼포먼스(?)가 끝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두 명 중 한 아이의 눈길이 사뭇 오랫동안 책에 가 있었다. 표정도 한껏 진지해보였다.

수업을 마치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니 바로 그 아이였다.

“선생님, 저… ”
“왜 무슨 할 말 있어? 말해봐.”
“저, 오늘 수업시간에 떠들어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너 민수에게 한 약속 잘 지켰잖아.”
“예?”

“거울 속에 있던 그 민수 말이야.”
“아, 예.”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거지?”
“예. 열심히 할 거예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그럼 믿고말고. 오늘 보니 우리 민수 정말 멋지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머리의 회전속도가 퍽 느린 편이다. 오죽했으면 동료교사들이  사오정이라는 별명을 내게 지어주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 앞에만 서면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간다. 어려운 상황에 닥칠수록 기발한 아이디어가 펑펑 샘솟는다. 그것은 혹시 내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희망이라는 말도 좋아하지만 절망이라는 말도 좋아한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면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현 정권을 지지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과거의 군사정권 시절을 향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필경 그들 중 대다수는 자유를 갈망해본 적이 없거나, 자유 없음에 대하여 절망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자유를 박탈당한들 절망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부터 ‘아이들의 인격을 키워주기 위한 교사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 모임을 꾸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순천사립지회가 주관하는 참교육실천발표대회가 열리던 날이었다. 나는 사례발표를 하던 도중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도 민망하고 창피하여 빨리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를 울보선생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올해 저희반 아이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행복한 시간도 많았지만 다시는 그 자리에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징그러운 고통의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 아이들은 갈수록 자기 생각만 하는지, 왜 그렇게 이기적인 아이들이 되어 가는지, 왜 교사의 인격적인 지도를 낯설어 하는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시간이 되자 아이들의 인격을 키워주기 위한 모임 같은 것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누군가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나서야 모임이 꾸려졌다. ‘아이들의 인격을 키워주기 위한 교사 소모임’에 참여한 교사들의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자기 생각이 없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들을 생각이 있는 아이들로 키우기 위한 고민이나 구체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학교에는 아이들의 인격적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교과나 교육과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입시만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인격적인 성장은 안중에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인성지도에 대한 거창하고 구태의연한 이론보다는 소박한 실천이다.’

올해 하반기 소모임 주제는 ‘아이들 강점 찾아 칭찬해주기’였다. 소모임에서 설문지를 제작하여 학교별로 칭찬 사례들을 모아 보았다. 분회 참실부장들이 주로 회원으로 활동하다보니 소모임에서 정한 주제가 학교 단위의 공동실천주제가 되기도 했다.     

나는 매주 한 통씩 전교조 전남 사립지회 소속 선생님들에게 이른바 ‘참실편지’를 보내고 있다. ‘참실’은 ‘참교육실천’의 준말이다. 편지를 보내자 속도와 경쟁의 논리에 휩싸인 학교에서 외롭게 교단을 지키던 교사들로부터 희망의 신호가 타전되어 왔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일제고사를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를 파면하고 해임하는 이 천박하고 불의한 시대에 날아온 희망의 신호이기에 더욱 반갑고 소중한 생각이 들었다.

시험에 길들어진 아이들은 절망을 이겨내는 희망의 상상력을 갖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입시교육을 심화시킬 뿐인 일제고사 부활은 국가의 위기일 수 있다. 일제고사를 반대한 교사들의 인식도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것은 또한,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 같은 것이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를 일부 수정한 글이 교육전문지 <우리교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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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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