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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이 유배생활 했던 초가집(능주)
▲ 유배지 정암이 유배생활 했던 초가집(능주)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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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1. 1519년(중종14년) 12월 20일

"죄인은 어명을 받으시오."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가 사립문을 밀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방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죄인은 용수철처럼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유배를 거둔다는 희소식이라도 가져온 걸까? 아니면?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죄인을 사사(賜死)하라는 어명이오."

중종 임금의 명을 받들어 한양에서 내려온 금부도사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무릎 꿇고 금부도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죄인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약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른 아침 까치가 울어대어 좋은 소식이라도 있으려니 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날벼락이었다.

"사사의 명만 있고 사사의 글은 없소?"

죄인의 항변에 금부도사가 쪽지 하나를 보여줬다.

"내가 전에 대부(大夫) 줄에 있었는데 어찌 쪽지 하나로 신을 죽이려 하겠소?

그는 죄를 받기 전. 대사헌이었다.

"죄인은 무엄하게도 어명을 따지려 드는 것이오?"

금부도사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도사를 불신한 것이 아니오니 너무 노여워 마오. 지필묵을 부탁하오."

죄인에게 붓과 벼루가 주어졌다. 하얀 종이위로 죄인의 손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암 묘역에 있는 절명시 시비(용인)
▲ 절명시. 정암 묘역에 있는 절명시 시비(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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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소소조단애(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나니
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검은 먹 점이 글씨가 된 형체 위에 하얀 눈발이 날렸다. 붓을 놓은 죄인은 하늘을 쳐다봤다. 회한이 밀려왔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4배를 올렸다. 검붉은 사약이 담긴 탕기에 새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심호흡을 하던 죄인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렸다. 약 사발을 바라보던 죄인은 사약을 단순에 들이켰다. 약사발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덕과 예를 바탕으로 한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했던 개혁사상가 조광조는 이렇게 사라져 갔다. 그의 정치사상은 자연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려는 강렬한 염원이 담겨 있었으나 기득권을 쫓는 훈구 세력에게는 목에 가시였다. 경륜이 짧은 그의 정책은 과격하여 보수 세력을 결속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으며 급진적인 그의 지향점은 수구세력의 저항을 불러왔다.

그의 사후 불과 25년이 되던 1544년 박세무와 신백령이 조광조를 신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현존 임금이 죽인 죄인을 당대에서 신원하라는 상소는 매우 이례적이고 도발적이다. "임금의 과오를 들추어 짐을 이렇게 능멸해도 되느냐?"라고 흥분한 군주가 피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허나, 당대에선 신원되지 못하고 선조 1년(1568) 기대승의 청으로 신원되었다. 조광조 죽음 49년만의 일이다.

조광조 적려유허비 비각(능주)
▲ 적려유허비 조광조 적려유허비 비각(능주)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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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사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진 날이 12월 16일. 이튿날 한양을 출발한 금부도사 유엄은 남행길을 재촉했다. 한양에서 능주 까지 900여리. 쉬지 않고 달렸다. 임금의 명이 의롭고 의롭지 않다는 것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임금의 명을 빨리 집행하는 것이 충성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집행이 49년 후 신원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장면2. 1642년(인조20년) 11월 12일

"역적 이계를 참수에 처하라."

인조 임금의 명을 받은 선전관 박지용과 금부도사 정석문은 서둘러 한양을 출발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1070리. 청나라 땅에 들어간 이계가 압록강을 건너오면 체포하여 즉시 처형해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임진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넜다. 청천강을 건너 국경이 가까워 올수록 회의가 들었다. 임금이 지목한 이계는 역적이 아닌 것만 같았다. 더욱이 죽여야 할 죄인은 더더욱 아닌 것만 같았다.

목적지 의주와 불과 70여리 떨어진 지점에 도착한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장계를 올렸다.

"경솔하게 이계를 처형하는 것은 곤란하겠으므로 우선 선천에 머물며 이계와 함께 청나라에 들어간 평안감사가 강을 건너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저쪽의 사정을 자세히 안 다음에 처치할 계획입니다."

어명을 받잡고 형 집행 현장에 파견된 선전관과 금부도사의 장계를 받은 조정은 경악했다.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선전관과 금부도사가 명을 받고 떠났으면 마땅히 주야로 달려가 성명(成命)을 받들어 행해야 할 것인데 감히 머뭇거리고 관망하며 천천히 길을 걸어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용만에 당도해서도 즉시 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니 국법이 어찌 시행되겠습니까. 명을 거역한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잡아와서 율에 따라 정죄할 것을 명하소서."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그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를 행했다.
▲ 항복.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그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를 행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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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은 이렇다. 1637년.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는 삼전도에서 임금의 항복을 받아내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고 군량미와 군대를 징발했다. 조선군을 이끌고 대명전쟁에 참전한 임경업 장군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아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에 발끈한 청나라는 집중 탐문한 결과 조정 내부에 반청파가 주도적으로 정책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정보 제공자가 이계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조정은 주화파와 척화파로 갈렸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좌익과 우익이 갈린 셈이다. 그 정점에 최명길과 김상헌이 있었다.

정시문과에 급제한 이계는 지평, 정언, 장령 사간 등 국가 엘리트 코스를 밟은 동량이었다. 국경 도시 선천부사로 부임한 그는 대륙의 지각변동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지는 해 명나라와 뜨는 해 청나라의 현실을 목도했다. 국가주의의 원천은 힘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생적인 극좌 탄생

주화를 부르짖던 최명길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밀파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절망했다. 망해가는 명나라와 후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환상이라 생각되었다. 힘이 재편되는 대륙의 현실을 인정하고 청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자는 것이다. 백년대계 외교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안타까웠다. 자생적인 극좌가 탄생한 것이다.

압록강 표지석
▲ 표지석. 압록강 표지석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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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칼을 빼들었다. 용골대를 국경에 파견한 홍타이지는 영의정을 비롯한 3정승을 소환하고 최명길, 김상헌, 임경업을 체포 압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극우로 지목된 '척화5신'을 심양으로 압송할 시나리오를 확정하고 의주에 도착했다.

조선 관료사회가 한기에 얼어붙었다. 용만에 불려간 영상과 좌·우의정은 바짝 엎드렸다. 청나라가 조선관료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다. 조선에겐 병자년 이후 최대의 위기다. 인조는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밀파한 후폭풍이 자신에게 밀려올까봐 서둘러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그 희생양이 이계였다.

선전관과 금부도사는 정책 결정자가 아니라 집행자다. 조정의 공기를 감지한 그들은 부담감을 느꼈다. 박지용과 정석문은 의주에 들어가 형을 집행했다. 다음날 이계의 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파발이 날아왔다. 하지만 이계의 목이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였다.

한양으로 압송된 금부도사와 선전관은 파직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그로부터 33년 후. 숙종1년(1675). 역적 혐의로 참수된 이계는 허적·권대운·허목의 청으로 신원 되었다. 천천히를 실행한 박지용과 정석문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는 속도를 알았는지 모른다.

군자는 군주의 뜻을 따르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김상헌은 그의 문집 <풍악문답(豊岳問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하는 임금의 뜻을 따르지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군자는 오직 의(義)를 따를 뿐이다. 의를 돌보지 않고 명령만 따르는 것은 환관들이나 하는 맹종이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충성이 아니다."

외교, 국방, 교과서 정책에서 관료들이 허둥대는 모습이 안타깝다. 설레발치지 않아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구른다. 목적지도 정해져 있다. 현재 그것을 모를 뿐이다. 명을 집행하는 관료들이 영혼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 일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도 영혼을 지킨 관료들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태그:#조광조, #인조, #이계, #김상헌,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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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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