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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아침인데, 비가 내렸다. 여행지에서 비가 오면 약간은 슬프다. 외로움을 즐기듯이 슬픔도 꽤나 즐기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번엔 일단 대책이 안 선다. 사진을 찍어야 하고 하루동안 소화해내야 하는 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비 타령만 할 수가 없어 길을 나섰다.

어젯밤 우리가 잔 곳은 아주 멋있는 펜션. 우리가 마당에 들어섰을 때, 마당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는 가족팀들의 저녁준비가 한창이었다.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우리가 차에서 내려 숙박비를 묻자 주인은 우리를 조용히 현관으로 안내하면서 가격을 말했다. 오만원이라고, 남이 들을세라 조곤조곤. 연휴라 해도 해가 지고 나면 더 이상 손님은 올 가망이 없고, 아마도 먼저 든 손님들보다 싼 가격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정원 아름답고 실내 깨끗하고 정말 나무랄 데 없는 방이었다. 게다가 우린 거기다 중요한 걸 두고 왔었다. 그리고 다음 날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출발하다가 그걸 생각해냈다. 울신랑 뭔가 빠진 듯한 허전함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전화했더니, 주인장님 무척 친절하셨다. 그냥 일반우편으로 보내달라 했지만 행여 분실될까, 등기로 보내주신 것까지. AS까지 철저하신 분이었다. 제주 남원에 있는 '테우펜션' 사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신영제주영화박물관
▲ 신영제주영화박물관 신영제주영화박물관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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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촉촉히 젖은 산책로...
▲ 남원큰엉해안 산책로 비가 와서 촉촉히 젖은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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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바다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 남원바다 비내리는 바다도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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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비안개가 시야를 잔뜩 가리고 있지만 신영제주박물관을 거쳐 남원큰엉 해안으로 갔다. 비가 와서 불편하긴 하지만 운치는 있다. 사람들도 없고 촉촉히 젖은 숲이 그윽한 향으로 우리를 반긴다. 언제 또 오겠냐며 산책로를 걸어가 바다를 보았다. 바다도 나름 몽환적인 분위기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조용히 비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아름다웠다.
▲ 표선 해수욕장 조용히 비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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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해수욕장도 당케포구도 우리에게 비안개 싸인 몽환적인 풍경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본래 제주에는 비가 많이 온다. 그런데 5일 여행 중 하루라면 양호한 편에 속한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도 일정대로 움직였다. 비오는 풍경을 흠뻑 즐기면서, 가다가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내려서 걷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하면서.

비가와서 쓸쓸한 포구였다.
▲ 당케포구 비가와서 쓸쓸한 포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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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굼부리 억새도 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억새는 은빛 물결로 가을의 낭만을 느끼게 해주지만 비에 젖은 억새는 한없이 측은해 보였다. 축처진 고개가 꼭 술 취한 홀아비 같아 불쌍해 보였다.

그 다음은 비자림. 몇 번이나 근처를 지났으면서도 결국은 비오는 날 찾게 되었다. 비자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울창했다. 온통 비자나무만 자라는 숲인데, 수령이 500~800년생 나무(2570여 그루)라고 한다. 산책로도 숲도 정말 대단했다. 아름드리 나무에는 나무이끼와 넝쿨이 엉키어 원시림을 방불케 했고, 비자열매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양쪽으로 비자나무가 빽빽하게 보초 서있는 산책로.
▲ 비자림 양쪽으로 비자나무가 빽빽하게 보초 서있는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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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비 때문에 한껏 즐기지는 못했다. 더구나 운동화가 새는 바람에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었다. 결국 양말까지 다 젖어 질척해진 운동화를 신고 중간쯤에 있다는 800년 된 비자나무를 찾아가 보았다. 밑둥이 얼마나 굵은지 두 사람이 안아도 남을 정도였다. 잔가지도 엄청나게 많이 뻗어 있어 해가 나도 이곳은 어두울 것 같았다. 큰 나무를 보면 왠지 신령한 기운이 느껴져 마음도 숙연해진다.

내려오다가 신기한 걸 발견했다. 나무에 수도꼭지가 붙어 있었던 것. 옛날 비자나무 숲 지킴이(산감) 이용하던 우물이라는데 비자나무 뿌리가 머금고 있던 물이 고여 생긴 우물이라고. 그런데 그 뿌리가 자연스럽게 정수기 필터 역할까지 해주어 물이 항상 맑다고 한다. 이곳은 날이 아무리 더워도 시원하게 산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무가 워낙 촘촘하게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이렇게 신기한 우물은 처음이었다.
▲ 비자나무 우물 이렇게 신기한 우물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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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것은 한라산을 쳐다보기만 하고 온 것이다. 영실 주차장에 갔지만 비가 오는데다 비안개가 너무 진해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더구나 우리에겐 저녁 약속이 있었다. 30년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생과의 약속이었다. 중학교 때 한동안 친하게 지내기도 한 친군데 동문까페를 통해 제주에 산다는 걸 알게 돼, 미리 연락을 해놓았었다.

그리고 서귀포에 간 날 잠시 얼굴만 봤다. 그 친구 얼굴을 보기 전에는 참 많이 궁금했다.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정확히 33년만이니 그 친구는 얼굴이나 제대로 알아 볼지 모르겠다며 설레는 마음을 내비쳤고. 나만큼이나 그 친구도 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친구의 남편은 대학에 있다고 하고, 친구는 2년 전 문화해설사라고 했는데, 이번에 알아보니 서귀포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50대에 문화해설사에서 큐레이터로 발돋음이라니 내 궁금증은 마냥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그녀가 갖고 있을 분위기였다. 화려할까, 아니면 지적이고 검소할까? 다른 동창이 제주에 골프 여행을 왔었다고 하는데, 혹시 이 친구도 골프나 치러다니는 부유한 사모님은 아닐까? 내가 못나 그런지, 골프하면 왠지 거리감이 느껴져 살짝 경계심도 생겨났다. 그런데 어제 만나 본 바로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다행히. 그래서 오늘 저녁 약속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찌감치 제주 시내로 들어와서 방을 잡았다. 오늘은 둘쨋 날 잤던 바로 옆 호텔이다. 먼저가 좋았는데, 나와 울 신랑이 다른 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한 번 좋았으면 굳세게 그쪽만 가는 데 비해, 이 남자는 새로운 곳을 선호한다. 이번엔 만원이나 비싼 데도 그곳을 고집해 못이기는 척 하고 따라갔더니, 시설은 먼저 호텔보다 못했다.

친구는 자동차를 버스정류장에 주차해놓고 버스로 서귀포까지 출퇴근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버스에서 내려서 우리 호텔로 데리러 오겠단다. 친구 차는 구형 중형차였다. 18년째 타고 있다나. 차 못지않게 친구의 옷차림도 아주 검소했다. 우리는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전복전문점으로 갔다. 메뉴는 전복 뚝배기와 전복 돌솥밥, 전복구이.

모양도 맛도 좋은 전복구이. 그런데 가격은 만팔천원으로 좀 비쌌다.
▲ 전복구이 모양도 맛도 좋은 전복구이. 그런데 가격은 만팔천원으로 좀 비쌌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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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친구의 두 아들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둘 다 서울에 있는데, 하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막 취업을 했고, 하나는 아직 학생이라고 했다. 나는 생활 수준이 중상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들이 오피스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오피스텔. 고시원에 있지. 몰라 난 한 번도 가보지 않았어."
"아니. 한 번도..."
"나는 시간이 없거든. 직장 다니면서 박사 논문 준비 중인데 시간이 있겠니. 그리고 그만큼 키워놨으면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언제까지 쫓아다녀."
"으응, 그래애."


내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친구는 막 웃으면서 말했다.

"너 내가 너무 한다는 표정이다."
"아냐 그런 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너무 정답이라서 벙벙한 거지."
"나도 걔네들이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과일 쥬스도 집에서 직접 갈아먹일 정도로 정성을 다 했단다. 그렇지만 이젠 스스로 해결하라고 맡겨두는 거야. 이번에도 취업했다고 돈 좀 달라는데, 일부만 주고 그것도 첫 월급 타면 갚으라고 했어. 그래야 제대로 독립할 거 아냐."


문화해설사에서 큐레이터가 된 것도 필요한 자격증을 취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고도 역사에 관한 논문을 준비중이라니 참 놀라웠다. 진정으로 의지의 한국인을 만난 것 같아 친구가 존경스럽고 한편 고마웠다. 우리가 둘이어서 내가 밥값을 내려고 했는데, 친구는 한사코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누구든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내는 거라나. 너무 비싼 저녁을 대접 받아 미안했지만 친구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제주여행하고, 반가운 친구 만나 비싼 저녁까지 대접받았다. 그리고 친구와는 아쉬운 작별을 했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작별이었다. 제주를 속살까지 다 보려면 적어도 열흘은 더 있어야 했지만 대충 겉핥기식의 마무리였다. 제주 올레는 걸어보지도 못하고, 한라산은 쳐다보기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다음을 기약했다. 유채꽃이 반겨줄 황홀한 제주의 봄날을.

덧붙이는 글 | 제주에는 10월 초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산굼부리 , #비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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