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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김홍도나 신윤복보다 낫네요."

"김 뭐시기라구유? 그게 누군디?"

"아주 유명한 옛날 우리나라의 화가예요. 김홍도 모르시는구나? <바람의 화원>에도 나오는데. 그럼, 레오날도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아세요?"

"뭐? 첼로가 뭐라고유?"

 

"그럼, 피카소는 아시죠?"

"피카추? 건 알지유. 텔레비전에서 봤시유."

"하하하. 근데 어떻게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세요?"

"그까이꺼 아무것두 아니여유. 그냥 그리면 돼유."

 

우리 마을의 '혜원 신윤복' 할머니

 

제가 모시고 있는 한 할머니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리십니다. 마음이 꽃 같아서인지 그녀의 그림은 온통 꽃밭입니다. 저는 항상 '오 집사님'하고 부릅니다. 목사와 성도 사이니까요.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하다 노인요양시설 '사랑의마을'에 오셨으니 당연히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 직원들은 '오 할머니'라고 부르지요. 비교적 공손한 표현으로는 성 뒤에 ‘어르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실습을 위해 온 요양보호사 교육생들이나 봉사를 하러 오신 분들은 '화가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그만큼 그림 잘 그리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 아직 한 번도 그리 불러보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혜원 집사님'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 한 봉사자가 김홍도니 신윤복이니 피카소를 들먹일 때, 그리 결정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분명히 제 눈에는 오 할머니는 혜원보다 훨씬 뛰어난 그림쟁이인 걸요.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을 원본으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방영되고, 영화 <미인도>도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남장 여인 신윤복의 에로틱한 부분을 부각시킴으로 소위 '신윤복 신드롬'을 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좀 나이 드신 신윤복, 할머니 혜원, 뭐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이제부터 '혜원 집사님'이라고 부를 거라고 하니까, 오 집사님은 "그게 뭔데유?"라고 물으십니다.

 

"집사님, 그게 아주 좋은 거예요. 하하하. 오 집사님이 그림을 아주 잘 그리신다는 뜻이죠. 조선시대 때 유명한 화가 중에 신윤복이라는 분이 있는데요. 그의 호가 바로 '혜원'이예요. 그래서 ‘혜원’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아이구, 목사님두, 지가 무슨 화가여유. 그냥 심심할 때 그리는 건데유."

 

"그러니까요. 심심할 때 아무렇게 그리시는데도 제가 볼 때는 신윤복보다 오 집사님이 훨씬 잘 그리시는데요."

"참 목사님두. 잘 봐주셔서 감사해유."

 

그림 자랑에 흠뻑 빠지신 할머니

 

 

일단 그림 이야기만 나오면 할머니는 끝 간 데 없이 만단정화를 늘어놓으십니다. 그림 자랑이라고 그저 그림 자랑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소싯적 이야기부터 자녀들 이야기, 그리고 신앙 이야기까지 끝이 없습니다. 할머니가 그린 그림 수만큼이나 풍성합니다.

 

"목사님,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유. 지가 이 취미도 없으면 어쩧게 살겄시유. 그저 한 번 본 것은 다 그려유. 상상해서 그린다 그래두 되구, 본 걸 그대로 그린다 그래두 돼유. 이건유. 퇴끼를 그린 거구유. 이건 고추를 그린 거여유. 이건 봉숭아꽃이구유…."

 

제가 보기엔 비슷한 꽃도 할머니에겐 전혀 다른 종류의 꽃 그림입니다. 말씀하시다 말고 입술이 마르니까 할머니는 물 한 모금을 들이 마십니다.

 

"지가 이래유. 목이 말라서 말이 잘 안 나와유. … 밤에 잠을 잘 못 자유. 그래서 일어나 앉아 뭐 허겄시유? 기도하다 그래두 잠이 안 오면 그림 그리는 거지유. 다른 사람들이 깨면 안 되니까 도둑괭이처럼 일어나 침대 밑에 앉아 불두 읎는 데서 그려유. 근데두 아침에 보면 그림이 돼 있더라구유."

"참 대단하시네요. 한석봉이 댈 게 아니네요?"

 

"맞아유. 한석봉이는 불 끄고 붓글씨 쓰구, 한석봉이 어머니는 떡 썰었잖아유? 지두 그 경우여유."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데서 그리신데요? 글씨보다 그림이 더 어려우니 오 집사님은 한석봉보다 더 멋진 화가시네요."

"그렇지유. 지가 그린 그림 좀 보실래유?"

"어디 좀 보여주세요."

 

할머니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골판지 박스를 여십니다. 스케치북이 여러 개 나옵니다. 그간도 제가 할머니에게 갈 때마다 이리저리 뒤져 그간 그린 그림을 보여주곤 하셨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렸노라고 칭찬을 해드리면 예전에 보여주셨던 그림까지 또 내놓으십니다.

 

"이것들은 대전에서 실습 오셨던 어떤 분이 사다주셨어유. 여기다 그림 그리라구. 아무 종이나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리니까 안쓰러웠던 모양이예유. 목사님께 잘 그린 걸루 보여드려야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다 잘 그리셨네요. 뭐."

 

할머니가 그린 그림은 한도 끝도 없이 그 골판지 상자에서 나옵니다. 간호사가 "오 할머니, 병원 가셔야지요"라고 말할 때까지 계속 그림 뭉치를 꺼내십니다. 제가 대강 그림을 챙겨가지고 일어났습니다. 슬라이드 안에 든 그림은 그녀가 그린 그림 중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간 그리신 그림이 200여 점은 족히 될 것입니다.

 

협심증이 빨리 낳아야 할 텐데

 

할머니는 협심증으로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과체중인데다가 혈압도 높으셔서 건강이 걱정입니다. 72세면 우리 '사랑의마을'에서는 그리 늙으신 편은 아닙니다. 평균연령이 85세가 넘으니까요. 차라리 젊은 층에 속하지요.

 

하지만 잘 잡수시고(과식하신다는 말입니다) 과체중에 협심증이다 보니, 그간 수술을 둬 차례나 하셨고요. 이번의 병원 행은 좀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밤 가슴이 답답하여 깨셨다고 하시는 걸 보면 아무래도 큰 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제가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림 그리는 모습을 촬영하려고 했지만 손이 떨려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틈만 나면, 아니 틈을 내셔서 그녀만의 화풍이 물씬 풍기는 정물화를 그렸었는데, 누구든 부탁하면 즉석에서 그가 원하는 그림을(실은 할머니가 원하는 그림이지만) 그려 보이셨는데, 빨리 병원에서 완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간호사에게 이끌려 병원으로 가시면서 남기신 말이 귀에 남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무죄라곤 하지만…. 그리 힘든 몸을 하시고도 자신의 병을 자식에게 알렸다고 직원에게 지청구를 주시는군요.

 

"이그, 바쁜 새끼에겐 뭐 하러 알렸어유. 지 먹구살기도 힘든디."

 

ⓒ 오 할머니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갓피플, 당당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의마을'은 충남 연기군에 있는 노인복지시설입니다. 글쓴이는 이곳에서 어른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있습니다.


#할머니 화가#어른과 함께살기#혜원#사랑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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