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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가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6자회담에서 북한의 검증의정서 수용과 한국의 에너지 지원을 연계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10·3합의를 비롯한 6자회담의 합의 사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6자회담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지고 남북관계의 추락은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8일자 <연합뉴스>는 6자회담 한국 수석대표인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경제, 에너지 지원은) 이번 6자회담에 있어서 중요 의제인 검증의정서와 포괄적으로 합의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익명의 정부 당국자 역시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도 동의하고 있다"고 말해, 에너지 지원을 검증과 연계하기로 했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검증의정서 채택과 관련해 최대 쟁점은 시료채취의 명문화 여부다. 한미일 세 나라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태도이고, 북한은 이러한 요구가 기존 합의에도 없는 내용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는 자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6자회담 테이블에서 에너지 지원을 검증과 포괄적으로 연계하겠다는 초강경 방침을 밝힘에 따라, 북한의 강력한 반발이 뒤따를 전망이다.

 

에너지 지원과 검증 연계는 합의 사항 '위반'

 

한국의 이런 방침이 무리수이자 악수(惡手)인 이유는 기존의 합의 사항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10·3 합의에 따르면, 북한 측 의무 사항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변 핵시설 불능화이고 다른 하나는 핵 신고다. 이에 반해 다른 5자는 이미 제공한 10만톤을 포함해 100만톤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의 조치들과 병렬적으로 북한에 대한 공약을 완수"하기로 했다. 여기서 북한에 대한 공약은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종료를 의미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검증 대상과 관련해 10·3 합의에서는 불능화 시설로 명시하고 있다. 불능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조치들은 "모든 참가국들에 수용 가능하고, 과학적이고, 안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또한 국제적 기준에 부합돼야 한다는 원칙들에 따라 수석대표들에 의해 채택될 것이다"라고 합의한 것이다. 전문에서 한 번 언급된 이후, '검증'이라는 단어는 10·3합의에서 딱 한 번 나왔다.

 

시료채취를 포함한 추가 검증은 북한의 핵 신고를 겨냥한 것이다. 그런데 10·3합의에는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라고만 언급되어 있다. 검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북한은 검증 대상을 10·3 합의에 따라 불능화된 핵시설이라고 못 박고 있고, 시료채취를 포함한 추가 검증은 다음 단계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한미일 3국은 합의에도 없던 새로운 사항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에너지 지원을 시료채취가 포함된 검증의정서 채택과 연계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방침은 10·3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에너지 지원-검증 연계방침은 7월 12일 채택된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 합의 내용도 위반하는 것이다. 이 합의문에서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여타 참가국들에 의한 대북 중유와 비중유 잔여분 지원은 병행하여 완전하게 이행될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합의문 어디에도 에너지 지원의 조건으로 검증의정서 채택이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의 오늘이 한국의 내일이 될 수도

 

아직 6자회담이 이틀이 남아 있어 그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한국이 6자회담의 창조적 중재자에서 '훼방꾼'(spoiler)으로 전락한 이후, 중국은 나 홀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6자회담 장에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6자회담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MB 정부의 악수는 남북관계의 또 하나의 악재로 작용할 것이 확실하다. 북한은 남한이 기존 합의 사항까지 위반하면서 '외세의 편을 들었다'고 반발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 에너지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북한은 불능화 조치를 또 다시 중단하고 원상복구를 시도할 것이다. 특히 일본에 이어 한국도 6자회담에서 빠져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6자회담 틀은 총체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MB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음에도 왜 합의에도 없고 실효성도 없는 '에너지 지원-검증 연계론'을 들고 나온 것일까? 정부가 '에너지가 없는 북한이 무릎 꿇고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면, 의도적으로 6자회담과 북미관계 개선에 제동을 걸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는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다.

 

한국의 훼방으로 2단계 이행조치와 초기 검증의정서 채택이 무산되면,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관계와 6자회담의 급진전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MB 정부는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관계의 개선을 봉쇄해 통미봉남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또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의 악화는 공안정국을 조성해 "좌편향을 바로잡겠다"는 정부여당의 '보수 혁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효과가 있다. 안보위기를 조장해 국민들의 불만을 딴 곳으로 돌려보겠다는 판에 박힌 속셈도 읽힌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해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우이길 바라고 선입견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달리 해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부의 행태는 상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정부의 악의적인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합의 사항까지 무시하는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좀 늦추고 갈등을 조장할 수는 있겠지만, 6자회담과 북미관계의 대세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인터넷을 통해 6자회담 합의문을 비롯한 각종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정부의 구미에 맞게 정보정치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MB 정부는 악의적인 의도가 만천하에 드러나기 전에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합의 사항에 충실하면 된다. 6자회담에서 일본의 오늘이 한국의 내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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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검증#시료채취#10·3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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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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