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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국회의사당. 미국 워싱턴 국회 의사당의 쌍둥이 축소판.
 쿠바 국회의사당. 미국 워싱턴 국회 의사당의 쌍둥이 축소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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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쿨쿨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아바나. 그 날 아바나의 정반대편인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우리가 엇갈렸던 날, J는 기차역이 아닌 그만 버스터미널로 가 버렸다. 그렇게 우린 엇갈린 채 만 이틀을 따로 보낸 것이다. 생판 처음 보는 터미널 직원에게 무슨 배짱에선지 쪽지와 함께 만약을 대비해 내 앞으로 50불 정도를 남겨두고 말이다. 사람에 대한 순수한 믿음,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J, 숙박 주소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아바나에 떨어져 기억 태엽을 뒤로 돌려 가까스로 숙소 주변의 영국대사관을 희미하게 캐치해 냈단다. 지금은 세상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는 녀석. 행여 깰까 조심히 한 번 웃는 걸로 해프닝을 마무리 한다.

모로 요새(Castillo del Morro)와의 사이에 대기시켜 놓아 만으로 침투하는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 포 모로 요새(Castillo del Morro)와의 사이에 대기시켜 놓아 만으로 침투하는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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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라 그런지 쿠바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이 자주 눈에 띈다.차이나타운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중국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겉모습은 중국 레스토랑들과 낙서류의 벽화들이 즐비해 있다.
▲ 차이나타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라 그런지 쿠바로 유학 오는 중국 학생들이 자주 눈에 띈다.차이나타운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중국의 상징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겉모습은 중국 레스토랑들과 낙서류의 벽화들이 즐비해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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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자전거 여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을 장식할 아바나의 속살을 더 맛보기 위해 짐들을 풀어헤쳤다. 그리고 앙상한 뼈대마냥 프레임과 바퀴만 남은 자전거를 들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뚫는다. 꿈결에 비단길을 휘젓던 J도 어느 새 찬물로 정신을 깨우고는 호연지기를 가다듬으며 며칠 만에 딱딱한 아스팔트 길 위로 올라섰다.  

아바나. 탈사회주의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이 도시를 거대하게 감싸고 있는 낭만을 한꺼풀만 벗겨보는 것. 그렇다면 천혜의 자연환경으로도 가릴 수 없는 빈국의 참담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질까. 아님 더욱 쿠바다운 쿠바, 빈곤 속 풍요를 누리는 그들만의 삶의 체취가 흥건히 묻어나올까. 답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 속에 있다.

맛과 멋이 있다.
▲ 쿠바의 레스토랑엔… 맛과 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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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쿠바노들에겐 가난 그 자체다.
▲ 여행자에게는 낭만인 구시가지 … 하지만 쿠바노들에겐 가난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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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는 단절됨이 묘하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자웅동체형 도시다. 도시의 특색을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하기가 여간 '거시기'한 것이 아니다. 땅과 바다의 경계선을 갈라 해일을 막고 도로를 놓은 말레콘 방파제. 그 현장이 어쩌면 친환경주의 시대를 거스른 듯 하지만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파제란 수식어로 누구에게나 어머니 품 같은 안식처가 되고 있다.

그리고 모자와 수염.
▲ 시가 그리고 모자와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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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의 잔재가 미화된 낡고 건조한 올드 아바나에서 옛 향수를 들이킨다. 그리고 조금만 고개를 옆으로 젖혀보면 몸에 맞지 않게 급하게 코스모폴리탄의 옷을 껴입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아침 커튼을 열 때마다 스카이라인이 바뀌는 개발도상국에 비하면 외형적 성장은 느린 편이지만 아침 인사를 건넬 때마다 자본주의의 기름 냄새를 조금씩 풍기며 배시시 웃는 그들의 모습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역할이 점점 더 생경스러워진다.

이중통화 적용. 외국인 전용 화폐인 CUC는 이제 더 이상 방문자만의 통화가 아닌 쿠바의 일부 서민들도 쓰는 화폐로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시골이나 중소도시에서 많이 통용되는 페소 단위 역시 당분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여 미국은 싫어하지만 달러는 사랑하는 이 섬나라가 통화개혁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이 두 화폐를 껴안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사회주의라면서도 교묘하게 사유재산의 차를 두고 있는 과도기에 정보에 취약한 세대가 이미 쿠바 경제 개혁의 뱃머리에 올라 탄 '경제적으로 선택된' 선발주자들과 궤를 같이 할 것인지 아니면 나라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 눈치 보는 상황들. 아바나의 시민들은 같은 하늘 아래 전혀 다른 두 가지 제도의 굴레 안에 살아가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1CUC로 24잔(1CUC=24페소)의 망고쥬스를 맛볼 수 있는 가게와 불과 몇 집 건너지 않아 한 끼에 10CUC이상 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묘한 불협화음도 그런대로 어우러져 가는 도시. 방파제 넘어 밀려드는 파도에 꾀죄죄한 아이들과 어울려 다이빙을 하고, 바로 앞에 늘어선 호텔에서 깔끔하게 샤워를 할 수 있는 도시.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호기롭게 마차를 타고, 없으면 없는대로 뚜벅이 도보 여행으로 마음껏 유람할 수 있는 도시. 엄격한 여행자 통제시스템을 적용시키지만 돈과 때론 진실된 마음만 있으면 사실 어지간한 제도는 죄다 허물어 버릴 수 있는 도시.

거리의 예술로 아바나의 거리를 한껏 아늑하게 만들어 준다.
▲ 펜화가 거리의 예술로 아바나의 거리를 한껏 아늑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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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는 말, 하늘엔 비둘기. 아바나의 여행자 거리에서.
▲ 마차 땅에는 말, 하늘엔 비둘기. 아바나의 여행자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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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미묘하게 복잡한, 거칠면서도 소박한 매력이 있는 이 도시를 아무런 간섭 없이 자전거로 달린다. 내 방식대로, 이 도시를 사랑하고 싶은 자유로 인해. 카리브 해의 강한 햇살과 바닷바람에 벗겨지는 피부마냥 아바나의 속살도 이제 그만 한 쪽으로 못을 박고 정체를 드러낼 때가 됐을까. 아니면 지금 이 이상하고도 재미있는 이원적 시스템을 혼돈기의 완충작용쯤으로 여기며 여전히 계속 이어갈까. 아마 그 대답은 피델에서 라울로 변한 카스트로 정부가 해 줄 것이다. 

체 게바라 아니면 장사가 안 될 정도. '체(Che)'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 노상 서점 체 게바라 아니면 장사가 안 될 정도. '체(Che)'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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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가 그렇게 즐겨 마셨다는 칵테일. 이 잔을 비우고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로 작품을 써 나갔을까.
▲ 모히또 헤밍웨이가 그렇게 즐겨 마셨다는 칵테일. 이 잔을 비우고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로 작품을 써 나갔을까.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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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 가지. 사회가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그리고 쿠바가 어떻든! 아바나 시민을 포함한 쿠바 국민의 춤과 낭만과 여유는 계속될 것이다. 지구상의 바퀴벌레가 사라지는 그 날까지 앞으로도 쭈욱. 그들 방식대로, 이 도시를 사랑하고 싶은 자유로 인해.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쿠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라이딩인아메리카, #아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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