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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일본 군인들의 연쇄자살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광기의 파시즘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사실 태평양전쟁 당시 대부분 일본 군인은 파시스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전쟁 일화가 있다.

일본군 육군 소위 오노다 히로가 있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겨울, 필리핀 마닐라 근처의 작은 섬 루뱅에 파견되었다. 그는 250명의 훈련되지 않은 병사를 이끄는 지휘관이었다. 오노다 소위는 미군의 루손 섬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비행장 활주로를 파괴한 후,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장 요코야마 시즈오는 떠나는 오노다 일행에게 말했다.

"항복은 물론 옥쇄도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버텨야 한다. 반드시 데리러 오마. 병사가 한 명이 남더라도 야자수 열매라도 따먹으며 끝가지 버텨라. 다시 말하지만 항복은 물론 옥쇄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듬해 봄 미군이 상륙하면서, 화력에서 밀린 일본 주력군은 오노다 부대를 남기고 패퇴한다. 오노다 부대는 첫 전투에서 207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43명은 산 속으로 흩어졌다. 오노다 소위는 시마다 오장, 고즈카 일병과 함께 주저 없이 산 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개시했다.

미군이 살포한 삐라 전단을 읽고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알게 된 나머지 40명은 투항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노다는 미군의 전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명령에 따라 부하 두 명을 데리고 유격전을 계속했다.

전쟁은 끝났건만…

전쟁은 끝났다.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봄, 오노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투항했던 옛 부하들이 필리핀으로 가서 섬 전체를 돌아다녔다.

"오노다, 오노다! 나와라 전쟁은 끝났다.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오노다는 그들이 외치고 다니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는 두 부하에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역시 간사한 미국 놈들이다. 우리를 잡으려고 내 부하들까지 동원하다니."

얼마 후 오노다 일행은 원주민 부락을 습격하여 불태웠다. 그들은 나름대로 유격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필리핀 정부의 연락을 받은 일본 정부는 오노다의 형제를 급히 루뱅 섬으로 보냈다. 형제들은 오노다가 있을 법한 산 속에 마이크를 대고 외쳤다.

"오노다야, 나와라. 전쟁은 끝났단다. 얼른 집으로 가자."

오노다는 먼발치서 형제들이 애타게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대답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형제들은 가족사진과 부모가 쓴 편지를 놓고 발길을 돌렸다. 오노다는 그것들을 보며 말했다.

"간악한 미국 놈들이 이제 가족까지 동원하는구나."

오노다 일행은 다시 유격전을 전개한답시고 마을에 나타나 섬의 원주민을 살해했다. 그러자 필리핀 군대는 토벌대를 급파했다. 종전 9년 차인 1954년에 오노다의 부하 시마다 오장이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종전 20년인 1965년에는 고즈카 일병이 사망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개의치 않고 단신 유격전을 수행한다.

오노다 소위, 단신으로 유격전 전개

그는 야자수 열매를 따던 원주민 소년을 토막 내 살해하기도 했다.

"그들이 거기 있었던 것이 불운이었소."

이것은 나중에 오노다가 뱉은 말이었다.

일본 시민단체에서는 해마다 루뱅 섬으로 사람을 보내 오노다를 찾았다. 그러나 오노다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인들은 필리핀 주재 일본 대사관 이름으로 우편함을 설치했다.

"여기 고국에서 온 편지와 신문들을 놓고 갑니다."

얼마 후 오노다는 원주민 부락에 나타나 라디오를 약탈해 갔다. 일본에서는 여론의 관심이 높아져 오노다 구출본부가 결성되었다.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오노다의 고등학교 동창생들까지 데려가 추억의 교가를 부르게 했다. 그들 중에는 교가를 부르며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영어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서양 민요에 오노다의 이름을 넣어 부르는 노래를 지어 유행시켰다.

서산 너머 해가 지고 달이 뜨건만,
한 번 떠난 오노다는 돌아오지 않네.
오노다여 오노다 퀴클리 컴백 투미,
오노다여 오노다 퀴클리 컴백 투미.

종전 30년째인 1974년 겨울, 마침내 오노다는 스즈끼 노리오라는 일본인 청년에게 발견된다. 스즈끼는 침착한 언행으로 오노다를 안심시킨 후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오노다는 그때서야 비로소 일본의 항복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스즈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나, 오노다 소위의 직속상관이 와서 항복 명령을 내리기까지는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소."

직속상관 중 하나였던 다니구치 요시미가 수소문되었다. 다니구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옛 부하를 살리는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골프백을 휴대하고 필리핀으로 갔다. 그는 어차피 가야 할 것이면 잠깐 오노다를 만난 후 클라그 리조트에 가서 골프나 즐길 요량으로 필리핀에 간 것이었다.

오노다는 직속상관에게 투항명령서를 정식으로 수령했다. 그 날 밤 다니구치는 졸음을 참아가면서, 30년에 걸친 루뱅 섬 정찰 및 전투 결과를 오노다에게 보고 받아야 했다. 다음 날 오노다는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투항 의식을 치른 뒤 일본으로 귀환한다. 마르코스는 오노다를 사면했다.

정작 놀라운 일은 오노다가 아닌 일본 국민들에 의해 극화되었다. 그들은 오노다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면서 국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투항명령서 정식 전달식,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항복 세리머니,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노병의 거수경례, 조금도 녹슬지 않은 제국 군인의 총검, 깡마른 신체에 광채가 살아 있는 장교의 눈동자 등에서 일본인들은 감동을 먹은 것이었다.

"인생의 귀중한 30년을 정글에서만 보냈는데, 그 세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젊은 시절에 심신을 바쳤기에 행복합니다."

"30년 간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요?"
"임무의 완수뿐이었습니다."

"하산하기 위해서 직속상관의 명령이 그렇게도 꼭 필요했던가요?"
"물론입니다. 명령에 따르는 것은 군기의 기본입니다. 명령이 없는 한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스즈끼를 만나 대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임무 완수를 위한 정보 수집의 일환으로 만난 것이지,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글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혼자서 발을 뻗을 정도의 공간을 마련했고, 야자수 잎을 엮어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언제나 장작이나 화로가 젖지 않도록 유의했습니다. 바람이 심할 때는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자지 않고 지켰습니다. 우기에는 채소를 구할 수가 없어 애를 먹었고 건기에는 채소가 말라서 걱정이었습니다. 가지, 마늘, 호박잎 등의 푸른 채소를 먹었고 토마토와 고구마 즙을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타민을 섭취하기 위해 생육기의 야자수 열매를 의도적으로 많이 먹었습니다."

몇 달 후 오노다는 취재를 위해 찾아간 젊은 기자에게 말했다.

애 못 낳을 것 같다는 이유로 여자와 절교하는 노병

"여보게, 춤을 한 번 춰 보고 싶은데 혹시 그런 장소를 아나?"

기자는 신주쿠 영화관 앞에 있는 댄스홀로 그를 데리고 갔다. 오노다는 그곳 댄서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혼자서 그 댄서를 찾아갔다. 그러다가 낮에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햇빛 아래에서 보니 댄서는 몹시 늙은 여자였다. 조명 아래서 오노다는 댄서의 나이를 40정도로 보았는데, 실제 나이는 53세였다. 오노다는 댄서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다시 만나지 맙시다."
"안 만나도 좋은데 이유나 말해 보시지요."

오노다는 나이로 보아 애를 낳지 못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그 후 강연으로 돈을 만지게 된 오노다는 이듬해 브라질로 이민을 가 농장 사업에 성공했다.

"전후 일본은 과거의 소중한 가치들을 상실했다. 그래서인지 나를 '팬더'처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지긋지긋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하는 매혹적인 한국인들이 소개됩니다.



#오노다 소위#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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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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