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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다운 눈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을 며칠 앞두고 추워지는 날씨가, 난로 위에 놓았다. 새카맣게 타버린 도시락을 먹기도 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증기기관차를 연상시키며 펄펄 끓던 주전자 물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사진 설명에는 ‘60년대 교실 안에 있던 도시락’으로 되어 있는데요. 제가 다니던 학교 난로와 도시락보다 월등히 좋은 것 같습니다. 책상도 그렇고요.
 사진 설명에는 ‘60년대 교실 안에 있던 도시락’으로 되어 있는데요. 제가 다니던 학교 난로와 도시락보다 월등히 좋은 것 같습니다. 책상도 그렇고요.
ⓒ 심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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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추억은 도시락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4교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도시락을 꺼내먹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면 고소한 누룽지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또 다른 맛과 즐거움이 있었으니까요.

2교시가 끝나면 모두 도시락을 꺼내 탑을 쌓듯 조개탄 난로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맨 아래 있는 도시락이 달구어졌을 때 위치를 바꿔놓고 점심시간에 먹을 물을 떠 오는 일은 그날 주번이 도맡아서 했지요.   

훔쳐 먹기도 하고 바꿔먹기도 했던 도시락, 책은 빠뜨리고 가도 꼭 챙겨갔던 도시락에는 울고 웃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는 땡중처럼 수업시간에 난로 위 도시락만 주시하던 친구가 “선생님 ‘벤또’ 다 타요!”라고 했다가 선생님께 “야 임마, 너는 먹는 거만 보이냐!”라며 지청구를 듣기도 했습니다.  

친한 친구끼리 모여 먹기도 했고 선생님과 함께 먹는 아이들도 있었는데요. 선생님 집에서 과외를 받는 몇몇이 선생님과 함께 도시락을 먹는 모습은 마치 신라시대 성골과 진골을 가려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이야 추억을 얘기하며 웃지만, 당시에는 ‘빽쟁이’라고 놀려댔으니까요.      

초등학교 때만 해도 소시지는 이름도 몰랐고, 장조림과 계란부침은 꿈의 반찬이었습니다. 장조림 간장 맛도 보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원도 한도 없이 먹고 지냅니다만, 멸치볶음과 콩자반 역시 군침을 흘리게 했지요.  

집에서는 사카린이 들어갔다고 해서 먹지 않아서인지 ‘닥꽝’으로 불렸던 단무지 역시 맛있게 보였고, 윤기가 반질반질하고 짙은 커피색이 돋는 연뿌리도 침샘을 자극했는데요. 훗날 맛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친구들은 2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도시락을 까먹었는데 선생님이 알아차리고 창문을 열어놓으라고 해서 추운 겨울에 창문을 모두 열고 수업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먹을 자유도 누리지 못했던 시절의 아픔이었는데요. 앞뒤가 꽉 막힌 선생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내누님과 도시락

도시락은 어머니가 싸주는 게 일상적이지만, 제 도시락에는 막내 누님의 손맛과 정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도시락은 오후수업을 하기 시작하는 4학년부터 가지고 다녔는데 제가 3학년이던 해 가을에 셋째 누님이 시집가고 뒤이어 막내 누님이 밥을 해먹었거든요.

어머니는 ‘째보선창’에서 쌀장사와 물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김장이나 장작을 들이는 일 등 큰살림만 하셨고 밥은 누님들이 해먹었습니다. 큰 누님이 결혼하면서 부엌 열쇠를 둘째 누님에게 넘기고 둘째 누님은 셋째 누님에게 넘기는 식으로 물려받았지요. 

손맛이 어머니를 닮은 막내 누님이 집에서 담근 무짠지를 썰어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무쳐주면 도시락 반찬으로 그만이었습니다. 거기에 구운 김을 비벼 넣으면 향긋한 해태 냄새가 더해져 도시락을 다 먹도록 목이 마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마른 장대를 쪄서 넣어줬는데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여니까 비린내가 진동했고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맛있겠는데 이리 가져와 함께 먹자!”라고 했지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후로 장대는 쳐다보기도 싫더라고요. 

좋아했던 도시락 반찬은 꼬록(꼴뚜기)젓 무침, 콩나물무침, 김치무침, 김무침 등 무침 종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비만과는 거리가 먼 음식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입맛을 그렇게 길들여준 어머니와 막내 누님에게 감사할 따름이지요.

가장 으뜸으로 치는 도시락 반찬은 묵은 김치를 송송 썰어 김을 구워 비벼 넣고 들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리고 버무린 ‘묵은 김치무침’입니다. 맛이 고소하고 개운해서 좋아했는데요. 저만 좋은 게 아니라 고소한 냄새가 친구들 코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 부근에 살거나 부자이면서도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는데요. 점심시간에 맞춰 식모나 어머니가 따뜻한 숭늉과 도시락을 가져왔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비가 내리면 우산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그 애들이 부럽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릅니다.

학교 식당에서 뜨거운 국물과 국밥을 사먹을 수 있는 중학교에 입하하자 도시락 문화도 획기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국물은 5원 국밥은 10원씩 했는데 날씨가 추우면 어머니가 막내 누님이 고생한다며 도시락 대신 현금을 10원씩 주었거든요.

5학년 담임선생님과 도시락

“고요한 호수로 동무여 가자, 적막한 호수, 붓꽃들이 방긋 웃는 저 언덕을 넘어가며 노래 부르자, 적막한 호수···.”

쉬는 시간이면 바이올린을 켜던 초등학교 5학년 멋쟁이 담임선생님에게 배운 노래 가사인데요. 정겨우면서도 쓸쓸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노래입니다. 도시락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이기도 하지요.

몸이 허약했던 선생님의 따뜻한 점심을 위해 2교시가 끝나면 학교에서 2km가 넘는 선생님 집으로 도시락을 가지러 갔습니다. 구암동 선생님 댁에 도착하면 사모님이 찐 계란과 누룽지를 주셔서 맛있게 먹기도 했지요. 

그해 7월 초 전학 갈 때까지 4개월 동안을 도시락 심부름하러 다녔고, 여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 심부름과 잡무처리도 했는데요.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혼자 다녔는데 아버지가 엿 공장과 고물상을 하는 친구가 따라가고 싶다고 해서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함께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대화 상대가 있으니까 재미도 있고 좋았는데요. 공장에서 가져온 깨엿과 콩엿을 주며 좋아하던 친구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네요.

당시만 해도 중학교 진학이 시험제였기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시락을 가져오는 3교시와 4교시 수업은 친구 노트를 빌려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요. 모내기가 끝난 초록 들녘 논길을 오가며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바이올린을 즐겨 켜시던 멋쟁이 담임선생님도 돌아가셨고, 노래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함께 도시락을 가지러 다녔던 친구 ‘덕근’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이런저런 추억들이 아련히 떠오르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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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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