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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서거, 대통령 직 승게한 트루먼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급서한 후, 백악관에서 첫 각의가 열린 것은 4월 25일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국방장관 스팀슨은 모든 각료가 퇴장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에게 보고서를 제출한다.

1. 4개월 후 미국은 전대미문의 전율스러운 병기를 완성한다. 그로 인해 문명이 감당할 비극적 상황에 대해 미국은 도의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2. 이 프로젝트는 영국과 협조했지만 모든 자료는 미국만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향후 수 년 다른 나라는 이 지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3. 그러나 앞으로 다른 나라도 이것을 개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이 병기를 영구히 독점할 수는 없다.
4. 이 병기를 사용하면 약소국이 강대국을 불과 며칠 내에 정복할 수도 있다.
5. 현재 인류의 도덕적 수준으로 볼 때, 인류는 이 병기에 의해 문명의 몰락에 직면할 수도 있다.
6. 이 병기의 파괴력에 대한 인식 없이는 어떠한 평화 논의도 의미가 없다. 종래 관념에 의한 관리 제도로는 이 위험을 제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발상을 달리하는 철저한 감시 및 통제가 요구된다.
7. 이 병기를 다른 국가와 나누어야 할지의 문제가 차후 대외관계의 쟁점이 될 것이다.
8. 반면 이것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보존하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9. 이와 관련하여 정부의 행정과 입법 양 부문에서 필요한 조치의 권고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특별위원회의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이 항복한다. 히틀러가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지 8일, 그리고 그가 권총 자살한 지 7일 만이었다. 이제 원자폭탄을 사용한다면 대상은 일본뿐이었다. 트루먼은 독일이 항복한 다음 날인 5월 8일 대일 성명을 발표했다.

나치 독일은 패배했다.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는 한 우리의 공격은 더욱 강력해지고 일본의 모든 것은 파괴될 것이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일본 국민의 고난은 커진다. 그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본의 육해군이 무조건 항복하여 무기를 버릴 때까지 우리의 공격은 계속될 것이다.

군대의 무조건 항복은 일본 국민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전쟁의 종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해를 가져온 군부 지도자의 세력이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병사들이 자기 가족이나 농지 또는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조건 항복이란 일본 국민의 절멸이나 노예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 같은 조짐을 보였다. 이제 그들을 굴복시키려면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최대로 잡아 미군의 희생이 100만 명 정도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보고서가 트루먼에게 올라가 있었다.

원폭 투하에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트루먼

트루먼은 원자폭탄 보고서의 마지막 항에 명시되어 있는 특별위원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특별위원회는 관리와 군인, 과학자와 민간인 대표 등 14명으로 구성되었다. 과학자들은 일단 폭탄 사용에 반대했다. 그러나 차츰 조기 전쟁 종결이라는 명분으로 폭탄의 사용을 권고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된다. 그들은 폭탄 사용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그 세 가지는 '일본에 사용', '예고 없이 사용' 그리고 '군사시설에 사용' 등이었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원자폭탄 사용을 명령한다.

"원자폭탄으로 인한 인명 피해보다 그로 인해 구할 수 있는 인명이 최소 몇 배는 될 것이다."

트루먼의 재가 후 원폭 투하 지역 선정을 위한 극비 회의가 국방성 회의실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군인 측 책임자 그로브스 소장이 입을 열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장소는 적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을 수 있는 지역이라야 합니다. 그러자면 군사 지역이어야겠지요. 예컨대 군장비나 보급품 밀집지, 또는 군사 본부가 있는 곳이 적절합니다. 나는 도쿄, 교토, 니가타, 히로시마 등을 제안합니다."

스팀슨 국방장관이 그로브스의 제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도쿄는 안 됩니다. 천황은 일본의 상징으로 전후 일본 재건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황거가 있는 수도는 제외해야 합니다."

그로브스가 반박하려 하자 스팀슨은 재빨리 자기 발언을 추가했다.

"교토도 안 됩니다. 그곳은 예술과 문화의 고도입니다. 그런 곳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든다면 미국은 영원히 야만국이라고 비난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논의 끝에 오사카, 나고야, 요코야마, 후코오카, 히로시마 등이 포함된 17개 지역 중 세 군데를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그들은 최종적으로 니가타, 고쿠라, 히로시마를 선정했다. 그리고 예비 도시로 나가사키를 추가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일본에는 대규모로 군사 시설이 밀집해 있는 장소가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회의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주로 기술적인 문제를 자문했다. 오펜하이머와 페르미와 로렌스 등이 그들이었다.

"원자폭탄은 어느 높이에서 터트리느냐가 효과의 관건입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이 너무 높은 곳에서 폭발하면 에너지가 대기를 몰아내는 데 힘을 남용하게 되고, 반면 낮은 곳에서 폭발하면 에너지가 땅을 파헤치는 데 소모되기 때문이었다.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무서우므로 아군 비행기의 대처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원자폭탄에서 방출되는 중성자는 반경 1km 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기 대문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 4km 밖에 있어야 했다. 그러자면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나서 잠시도 머뭇거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투하 직후 방사능 구름을 신속히 빠져 나가야 합니다."

마침내 일본에 투하될 원자폭탄 세 개가 완성된다. 우라늄 235 폭탄 한 발과 플루토늄 폭탄 두 발이었다. 우라늄 폭탄은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제조되었지만, 플루토늄 폭탄은 연쇄반응 여부가 불확실했으므로 두 발이 제조되었다. 그리고 우라늄 폭탄에는 씬맨(thin man, 홀쭉이), 플루토늄 폭탄에는 팻맨(fat man, 뚱뚱이)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트루먼에게 최종 보고서가 올라갔다.

8월 1일 이후에는 투하가 언제든지 가능함. 돌발 사태가 생긴다고 해도 8월 10일을 결코 넘기지 않을 것임. 투하 예정지는 니가타, 고쿠라, 히로시마로 결정되었음.

트루먼은 육군참모총장을 불렀다. 이미 결정이 난 일이었지만 자신의 전율스러운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80여 일에 걸친 전투 끝에 1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다른 전투에서도 막대한 사상자를 냈습니다. 일본인은 항복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웠습니다. 그들의 전쟁 개념에는 항복이라는 항목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본 본토의 전투는 불가피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죽고 건물이 무너져 내려도 일본인은 저항할 것입니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미증유의 충격으로 그들의 기를 꺾어 버려야 합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전략공군사령관 스파츠에게 명령서를 전달했다.

1. 1945년 8월 3일 이후, 육안 폭격이 가능한 날을 선택하여 아래 지역 중 한 곳에 특수 폭탄을 투하하라.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
2. 추가 투하는 추후 명령에 따라 준비하라.

스파츠는 즉시 워싱턴을 출발하여 괌으로 향했다. 그는 괌에 가서 참모장 르메이 장군과 제509 혼성비행대대 지휘관 티베츠 대령에게 명령을 내릴 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의 삶이 펼쳐집니다.



#원자폭탄#트루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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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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