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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솟아 있는 여덟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스릴 넘치는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고흥 팔영산(八影山, 608.6m).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강산리와 영남면 양사리 등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예전부터 내가 꼭 한 번 가고 싶은 산 가운데 하나였다. 지난 23일, 마침 그곳으로 산행을 떠나는 산악회가 있어 나도 함께 따라나섰다.

 

예전에 팔전산, 팔령산, 팔점산이라 불렸던 그 산은 중국 위왕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면서 팔영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중국 위왕이 어느 날 세숫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하여 산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다. 신하들이 수소문 끝에 우리 고흥 땅에서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팔영산이라는 이야기이다.

 

좀 황당한 느낌도 있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현실적인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들면 도리어 싱겁다. 이웃 나라 중국에까지 소문이 날 만큼 팔영산의 산세가 몹시 빼어났다는 의미로 그저 받아들이면 되리라.

 

 

소소리바람이 불어 대던 지지난해 3월, 뾰족한 산봉우리 여덟 개가 이어져 있는 경북 영덕군 팔각산(八角山, 628m) 산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로프를 꽉 잡고 아슬아슬 오르내려야 하는 곳이 많아 산행 내내 오히려 지루한 줄 몰랐다. 내 기억에 아마 그때 팔각산과 비슷한 산세를 지닌 고흥 팔영산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오전 7시 50분에 마산서 출발하여 고흥군 점암면 강산리 곡강마을의 폐교된 강산초등학교 부근에서 산행을 시작한 시간은 10시 50분께였다. 우리는 바짝 마른 강산폭포를 지나 선녀봉 쪽으로 계속 걸어갔는데,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기도 하고 시야가 탁 트인 바위에 올라서서 눈앞에 펼쳐진 은은한 바다를 바라보며 시원한 조망을 즐기기도 했다.

 

 

팔영산의 여덟 봉우리가 한 폭의 그윽한 수묵화처럼 한눈에 들어오는 선녀봉(518m) 정상에 이른 시간은 낮 12시 10분께. 거기서 30분 정도 더 걸어가자 팔영산 1봉인 유영봉(儒影峰, 491m)과 2봉인 성주봉의 갈림길이 나왔다. 나는 일단 1봉으로 갔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서 2봉을 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능가사에서 산행을 시작한 많은 등산객들이 1봉을 오른 뒤 2봉 쪽으로 연이어 올라왔다. 일방통행로처럼 되어 버린 돌발적 상황 때문에 억지를 부려서라도 1봉으로 가려던 욕심을 버려야 했다. 어쩔 수 없이 2봉 성주봉(聖主峰, 538m) 정상을 향해 올라갔는데 갈림길에서 불과 5분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그곳에서 먼저 와 있던 일행 틈에 끼여 서둘러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팔영산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험하고 기암괴석이 많다. 그러나 위험한 곳에는 쇠줄과 철계단 등이 설치되어 있어 조심조심 오르내리면 된다. 거친 자연에 부드러운 사람의 손길을 조금 보태었다고 할까, 아슬아슬한 스릴도 즐기면서 아기자기한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산행 길에 빠져들 것만 같은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경 또한 일상으로 팍팍해진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된다.

 

2봉에서 10분 정도 가면 3봉 생황봉(笙簧峰, 564m)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바위 모양이 아악(雅樂)에 쓰이는 관악기인 생황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궁중 의식에서 연주된 악기로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생황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4봉 사자봉(獅子峰, 578m)을 거쳐 5봉 오로봉(五老峰, 579m)으로 올라갔다. 다섯 명의 늙은 신선이 놀다 간 곳이라 하니 무릉도원이나 다를 바 없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신선들이 그곳에 모여 앉아 노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괜스레 재미있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설렘이라고 할까, 6봉 두류봉(頭流峰

, 596m)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4봉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계속 내 눈길을 끌었다. 가파른 6봉을 오르면서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걸어온 봉우리들을 되돌아보니 왠지 지친 내 삶이 돌아앉아 있는 것 같았다. 

 

팔영산 산행은 스릴을 만끽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봉우리가 지닌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7봉 칠성봉(七星峰, 598m)을 지나서 '푸른 산'을 뜻하는 8봉 적취봉(積翠峰, 591m) 정상에 올라서자 푸른 산, 푸른 하늘, 푸른 마음, 푸른 꿈, 푸른 희망이 어우러져 있는 느낌에 한순간 유쾌함에 젖었다.

 

 

오후 2시 50분께 나는 팔영산에서 가장 높은 봉으로 8봉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는 깃대봉(608.6m)에 올랐다. 깃대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도 팔영산 여덟 봉우리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더욱이 정상에 위치한 고흥경찰서 팔영산 초소에서 생각지 않게 귀여운 개를 보게 되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할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던 개에게 새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산행 전날 아는 집에 임시로 맡겨 놓고 마음이 뒤숭숭해 있던 터였다. 몇 년 동안 키우던 개를 어떻게 헌신짝 버리듯 하는지 사람이 무섭다. 무엇보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일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능가사 대웅전 앞에서 팔영산 여덟 봉우리에 빠져들다

 

 

나는 깃대봉 정상에서 내려와 탑재를 거쳐 능가사(전남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 쪽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오후 3시 50분께 조선 시대의 승려로 사제간인 추계당과 사영당의 부도(전남 유형문화재 제264호) 등을 볼 수 있는 능가사 부도밭을 지나 능가사 경내로 들어섰다.

 

능가사는 창건 당시 이름이 보현사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뒤 조선 인조 22년(1644)에 벽천대사가 다시 건물을 짓고 능가사로 고쳐 불렀다. 조선 중·후기 호남 지역의 사찰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능가사 대웅전(보물 제1307호) 앞에 서서 바라보는 팔영산 여덟 봉우리의 전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능가사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약간 거칠게 다듬은 배흘림 형태이다. 나는 김애립의 작품으로 조선 숙종 24년(1698)에 만든 '강희37년명동종(보물 제1557호)'을 보러 갔다. 종 꼭대기 부분의 용뉴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 조선 시대의 범종으로서는 특이하게 종의 몸체에 팔괘(八卦) 문양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자연의 위용에 아기자기한 재미를 살짝 가미한 고흥 팔영산 산행은 한마디로 스릴 만점이었다. 한동안 팔영산 여덟 봉우리의 유쾌한 산행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태그:#팔영산, #여덟봉우리, #능가사, #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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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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