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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문서와 관련을 맺으며 살아간다.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하면 그 내용이 모두 공문서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문서의 주체 또는 객체가 되어 살아간다. 국가 조직 역시 아주 먼 옛날부터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공문서를 통해 의사를 전달해왔다.

<근대 공문서의 탄생>
▲ 표지 <근대 공문서의 탄생>
ⓒ 소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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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에서 공문서 제도가 획기적으로 바뀐 분기점이 갑오개혁이다. 조선 왕조 500년간 공문서에서 사용했던 중국 연호 대신 독자적 개국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고, 국한문 혼용체를 공식화해서 한글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러 분야에서 등장하던 '신식'이란 변화가 공문서에도 나타난 것이다. 개화기를 전후로 사용되었던 신식이란 단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식이란 말에 담긴 그 각별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 역사 속에 담긴 근대의 의미에 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

중국 연호 폐지, 독자적 연호 사용의 의미

1895년 내무대신 박영효 명의로 전국에 내린 총 88조항의 개국기년과 관련된 훈시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 86조 명나라와 청나라를 존숭하지 말고 우리나라의 개국기원을 정하였으니 제반 명문과 계약서 등에 청국 연호를 쓰지 말 것.(책 속에서)

조선왕조 500년간 독자적 연호가 사용된 적이 없던 상황에서 이 훈령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후 연호는 건양, 광무, 융희 등의 독자적 연호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당시의 반응도 살펴보자.

또한 한 가지 통쾌한 일이 있습니다. 갑오년 이전의 매매문기에 모두 타국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실로 50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의 수치였습니다. 이로부터 영원히 없애버렸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았겠습니까.(책 속에서)

중추원 의장 김가진이 올린 상소문이다. 중국 연호를 사용하던 수치를 벗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 통쾌한 일이라며 기뻐하고 있다. 비단 김가진 뿐 아니라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 역시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갑오개혁은 우리나라가 자주적 근대 국가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박영효가 내린 훈시 다음 항목을 살펴보자.

87조 인민에게 일본이 우리의 독립자주를 돕는 형편을 깨닫도록 알릴 것.(책 속에서)

무슨 말인가. 중국 연호를 벗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운 나라가 일본이라는 걸 백성들에게 널리 홍보하란 뜻이다. 중국 연호를 벗고 자주적 연호를 사용하게 해준 은인이 일본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국한문 사용 - 공문에서 최초로 한글 사용의 의미

갑오개혁 이전 한글은 문자생활에서 보완적 위치에 머무를 뿐이었다. 한글 창제 당시의 목적 역시 백성들을 위한 언문 정도에 그쳤다. 조선시대 법전에서는 언문으로 작성된 사문서는 소송에 접수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을 정도였다.

갑오개혁 때 관보에 실린 국한문혼용체 서고문
▲ 홍범 14조 서고문 갑오개혁 때 관보에 실린 국한문혼용체 서고문
ⓒ 소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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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이후 공문서에서 한글을 사용 문자로 규정한 조항은 1894년 11월 반포된 <공문식> 14조였다.

제14조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써 근본을 삼고 한문을 부역하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한글 사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공문식>의 반포로 인해 순한문 또는 이두로 표현되던 공문서는 사라지고 한글을 사용할 수 있었다. 기존에 순한문으로 발간되던 관보에도 한글이 사용되었다.

수백 년 동안 사용해오던 관행의 장벽 때문에 단시간에 바뀌지는 않았지만 공문서에서 한글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지속적으로 교과서, 신문, 소설 등으로 파급되어 한글 보급이 확산되었다.

갑오개혁 직후 공문서에 한글을 사용하도록 한 것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한글과 한문을 섞어 쓰는 게 일본어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관리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국정부 시대의 공문은 조선문을 한자와 언문으로 이어놓은 것이다. 원래 조선어는 다른 외국어와 달리 일본어와 매우 비슷한 조직으로 되어 있으며, 공통으로 한자와 한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조선어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내지인'이라고 해도 조선문 중 한자만 읽을 수 있으면 문장의 대의를 파악할 수 있다. (책 속에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문에서 국한문의 사용은 일본인이 공문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생각까지 든다. 중국 연호를 폐지하면서 일본인의 은혜를 강조했던 앞의 예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역사 속 근대의 의미

갑오개혁은 우리에게 진정한 근대의 길이었는가. 전통적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대신 일본이란 또 다른 외세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항 이후 우리 사회는 근대란 명목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우마차 대신 자동차가 새로 난 신작로 길로 흙먼지 날리며 달려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전옥답이었던 땅 위에 놓인 철로 위로 나는 새도 못 따를 속도로 기차가 달렸다.

변화에 밀려 사람들이 간도로 연해주로 떠나갔다. 그런 변화를 일컬어 사람들은 근대라 했다. 이렇게 맞은 근대는 결국 식민지로 이어졌다. 식민지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란 조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이익을 추구를 의미했다.

덧붙이는 글 | 김건우/소와당/2008. 8/22,000원



근대 공문서의 탄생

김건우 지음, 소와당(2008)


태그:#공문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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