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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가 '죽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민중가요를 추억하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이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민중가요의 미래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말]
ⓒ 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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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누구든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도 결국엔 행복 추구가 아닐까 한다. 예술을 직접하는 행위도 그렇고, 그것을 체험하는 행위도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 행복 욕구에 어느 정도 맞닿아 줘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노래가 있다. 별로 아름답지도 못하고 선언적이며 고리타분하다는 얘기까지 서슴없이 듣는, 소위 '민중가요'라는 노래들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노동가요'를 15년 동안 불러온 사람이다.

무식하리만치 강하면서, 슬픈 노래

내가 부르는 노래는 첫째, 무식하리만큼 강하다(내용이나 군가풍 형식에서나). 둘째, 많이 슬프다(바닥을 벅벅 기며 많이들 죽어나가며 살아온 노동자들의 노래이다 보니 하나 같이 슬프거나 처량한 곡이 많다). 셋째, 제대로 된 음향에서 불러본 적이 거의 없다(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러야 하기에 가수들 목이 하나 같이 병이 들었다). 넷째, 그래도 포기 못하고 그 희망이란 걸 잡아보려고 오늘도 거리에 선다.

이렇게 쓰고 보니 15년 동안 나도 참 처량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모두 다 사실인 것을. 그런데 왜 그 환경은 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걸까. 그래도 예전엔 가난했지만 '함께'라는 인식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노동가수는 '섭외하면 가서 노동가요나 불러주는 사람' 정도로 인식되는 것 같다.

힘든 사업장 동지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의 노래가 힘이 된다면, 그래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면, 더 나아가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달려갔는데…. 어라? 투쟁이 끝나면 더 이상 그들에게 노동가요는 필요가 없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려고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이제 바닥이라는 게 슬슬 보이다 보니 뭐라도 붙잡고 얘기하고픈 맘에 저절로 넋두리가 나오는 것 같다.

우리의 노래가 위안이 됐을까

ⓒ 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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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현대미포조선의 현장 탄압에 맞서 싸우다 건물 4층에서 목을 매고 뛰어내린 이홍우라는 노동자를 위한 거리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노동 운동의 메카였던 울산의 차가운 바닷바람 앞에서,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싣고 가는 버스를 향해 노래를 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중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는데도 현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산재 사고라도 나면 사람이 떨어진 피투성이 바닥에 물 한 양동이 붓고 다시 일을 시작한다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우리는 숨길 수 없는 그 절망을 그 분노를, 바람 부는 거리에서 노래했다.

비록 노래는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그래도 우리의 노래와 이야기가 얼어버리고 딱딱해진 그 심장들을 조금이라도 두드릴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를 했다. 강한 투쟁가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노동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고 노래했다. 꾸역꾸역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누르면서.

이 노래가 힘이 있을까? 이 노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확신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건 그래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어버린 현장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허공에 맴도는 거리의 노래가 될지라도 그 노래의 주인공들에게 다시 불러줘야만 했다. 어릴 적 나에게 확신을 준 그 노래들을 이제 내가 그들에게 돌려줘야만 했다.

내가 노동가요를 놓을 수 없는 까닭

요즘 들어 드는 고민은 진보하지 못하는 민중가요, 아니 노동가요가 과연 문제인가 하는 지점이다. '진보'란 말을 좋아는 하는데 도대체 뭐가 진보고 뭐가 퇴보인지…. 음악에서 '기술'을 뜻하는 진보라면 대중 노래판에서도 충분히 보고 느낄 거리들은 많다. 그럼 내용적인 진보? 어디서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지 나조차 매우 궁금하다.

10년 20년 함께 불러왔던 노래들이 지겨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바뀌어야 하나? 변화하지 않는, 변화하기 싫어하는 습성 때문이라면 그것은 분명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적인 건 아니다. 나는 자신들이 발딛고 서있는 공간에서 체험하고 느꼈던 감동들이 다시 표현되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실 구석에서 머리를 쥐어짜면서 만들어 내는 게 아닌, 자신에게 영감을 준 그 무엇에 기반해 만들어내는 것 말이다. 정확한 건 노동가요는 철저히 그 과정을 겪으면서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아는 선배 가수가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을 노래로 함께 하는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 선배 말을 듣고 많이 심각해진 적이 있었다. 더 이상 부르려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없다는 것. 결론을 말하자면 노동가요가 이제 정말 구세대의 음악 정도가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이제 노동가요는 더 이상 필요없는가? 음악의 질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노래라면 노동가요가 아니어도 가능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틀린 말들은 아니다. 무슨무슨 음악이라고 언제 우리가 규정해놓고 들었던가. 음악이 사람들 가슴을 울리면 그만인 것을.

하지만 바로 그 까닭 때문에 나는 더 노동가요를 놓을 수 없다. 그 노래를 알면서 내 삶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노동가요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쳐 주었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으며, 분노와 슬픔 그리고 싸우는 것까지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내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그 노래들이 이제는 내 마음과 입을 통해 더 많은 곳에서 불려지기를 원한다.

척박한 노동 현장을 노래하는 나는 '행복한' 가수

ⓒ 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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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촛불집회 때 무대에 선 적이 있는데 그 때 나온 기사 하나가 생각난다. 민중가요는 죽은 줄 알았는데 후일담 문화로 생각했는데,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노래들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다.

글쎄?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거나 잘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여긴 거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싸워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치는 이 사회에서 그 싸울 거리를, 또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노래가 후일담 노래처럼 도매급으로 넘어간다는 건 상당히 억울한 일이다.

세상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만큼 절실하고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노동가요는, 바로 그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빼앗긴 무언가를 찾고자 타협하지 않고 일어나 싸운 사람들을 위로했고 또 힘을 주었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함께 해왔다.

노동가요를 부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현장이었다. 앞도 보이지 않고, 끌려가고 해고되는 그 절박한 현실들, 그래도 다시 치고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투쟁으로 만들어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삶의 희망 역시 그 척박한 노동 현장에서 보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가장 예술적이고 진보적인 문화를 노동가요라고 얘기하고 싶다. 어떤 형식을 띠던 사람의 가장 소중한 삶을 노래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나는 그런 노래를 부르는 아주 행복한 가수이고 싶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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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중가요, #노동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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