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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배낭을 메고, 카메라 챙겨 들고서 집을 나섰다. 아파트 출입구 길가에 가득 늘어선 노란 빛의 은행나무와 비단잉어의 비늘처럼 바닥에 수북이 깔린 은행잎이 주위에 퍼뜨려 놓은 가을의 빛과 색은 아름다웠다.

 

 

걸어가면서 금빛 은행잎을 밟으니 푹신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운동화 속에 움츠린 발가락과 발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져 내 예민한 말초신경을 타고 가슴으로 왔다. 길거리에 운치 있게 뿌려져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느낌을 주는 금빛 은행잎의 희생은 낭만적이지만 헌신적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을의 선물'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자동차를 몰아 혼잡한 서울의 도심 속으로 향했다. 외곽에서 서울로, 서울로 향하는 자동차의 행렬은 주변에서 중심으로 빨려들어가는 자석의 쇳가루처럼 줄을 지었고, 일정한 원심력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서울의 도심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40분.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 주변에 조성된 석물도 살펴보고, 잠시 벤치에 앉아 바람에 뒹굴며 장난을 거는 마른 낙엽과 '나 잡아봐라'놀이를 했다. 11월 초중순이라 햇빛이 넉넉한 양지가 아닌 그늘진 곳엔 제법 차가운 바람도 있고, 쌀쌀하고 냉랭한 한기가 느껴졌다.

 

 

 

10시가 되어 박물관의 출입문이 열림과 동시에 아이들과 나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섰다. 박물관 안은 여기저기 곳곳에서 찾아온 아이들과 어른들의 산만한 움직임과 소란으로 금세 혼잡해졌다. 아이들과 나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의 박물관 탐방일정과 의미를 가볍게 교감하고 공유하였다.

 

우리는 먼저 3층에 마련된 상설전시관으로 향했다. 조선왕조의 수도였던 서울,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약 6000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자 우리 강토의 심장이랄 수 있는 '서울'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 배워보기로 했다.

 

나는 박물관의 관람순서 화살표 표시를 따라 아이들을 1) 조선의 수도, 서울 → 2) 서울 사람들의 생활 → 3) 서울의 문화 → 4) 도시서울의 발달 순으로 천천히 인솔했다. 모형과 영상물, 지도와 기록물, 그리고 각종 유물 등으로 전시된 서울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신기하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감상하였다.

 

나는 커다랗게 만든 옛 서울의 도성모형 앞에 아이들을 세우고, '서울'이란 이름의 유래와 이름의 변화과정과 그 의미에 대하여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서울>은 그 옛날에는 한성, 한양, 경성 등으로 불렸던 우리나라 도읍의 순 우리말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지었으며 또 이를 '서벌'이라고도 했단다. 당시는 나라 이름과 수도의 이름을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했던 것이지..."

"밀짚모자, 그러면 '서울'의 뜻이 뭐예요? 왜 서울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거죠?"

"그래, 좋은 질문이다. '서울'이라는 말은 '새 벌', '새 땅'이라는 뜻이 담긴 순 우리말이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가져온 자료집을 펼쳐 '서울'이란 이름의 변화과정에 대해 꼼꼼히 짚어가며 배움을 나누었다. 백제시대의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남평양, 신라의 북한산주, 통일신라의 한양군, 고려의 양주와 남경, 조선의 한양~한성,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시대 경성,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 서울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의 변화과정을 줄줄이 꼬리에 꼬리를 연결해가며 이야기하고 토론했다.

 

우리들은 약 6000년 전 서울지역의 면목동, 가락동, 역삼동 등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4대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대해서도 전시된 자료와 유물을 보며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서울의 4대문과 도성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해주었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설명했다.

 

"도성은 임금님이 계시던 도읍지가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다. 특히 조선시대의 도성은 풍수지리상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싸는 4개의 산-(동:낙산, 서:인왕산, 남:남산(목멱산), 북:북악산)내사산-을 연결하여 쌓은 것이란다."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동서남북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고, 중간에 문을 낸 것이 4대문인가요? 선생님 맞지요?"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였단다. 그래서 유교에서 중시하는 4가지 덕목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다가 신(信)을 더하여 5상을 서울 도성 4대문의 이름에 넣어 사용했던 것이지. 그러니까 동대문은 인을 일으킨다하여 '흥인지문', 서대문은 의를 두텁게 한다하여 '돈의문', 남대문은 예를 숭상한다 하여 '숭례문', 그런데 북대문의 이름이 조금 이상하단다. 원래 북쪽의 문은 지혜를 공경한다는 뜻의 이름을 넣어야 했는데, 북대문이 북악산에 있던 관계로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었다고 하지.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없이 맑고 고요하다'는 뜻을 써서 '숙정문'이라고 했다고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은 서울 한 가운데 광화문의 보신각에다 넣었다고 한단다."

 

나는 비교적 장황하게 설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나와 함께 박물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녀석들은 요즘 녀석들치고는 참으로 영특하고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를 설명해주면 그 이상의 것들을 추측하고 상상해서 꼬리를 물어 이야기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문득 초롱초롱한 녀석들의 호기심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관람순서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 계속 앞으로 이동해가며 오래 전 서울 사람들의 생활을 여러 가지 민속자료와 유물들을 통해서 볼 수 있었고, 시대를 거스른 발칙한 상상 속에도 빠져 볼 수 있었다.

 

 

나는 옛날 서울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전시물을 가지런히 진열해놓은 지점에 이르러 당시 여인네들의 곱디 고운 뒤꽂이와 옥으로 만든 비녀를 보았고, 저고리에 매달아 한 창 멋을 뽐내며 남정네들을 은근히 유혹했을 것 같은 매혹적인 노리개를 훔쳐보듯 살펴보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곳에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TV드라마(바람의 화원) 속 혜원 신윤복의 아리따운 정인 '정향'이 떠오르니 순간 기분이 묘해지고 나도 몰래 허튼 웃음이 절로 났다.

 

한편 남정네들의 담뱃대와 부채, 손으로만 섬세하게 다듬어 만든 분선(접는 부채)과 합선(접히지 않는 부채)의 멋들어진 장식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감상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채 끝에 매달아 풍류와 멋을 즐기며 자기만의 취향과 색깔을 은근슬쩍 자랑하는 사내들의 소심한 표현의 양상이 드러난 디자인의 결과물이 아닐까?' 하지만 과년한 여인네들의 농익은 유혹에 넓은 부챗살을 활짝 펼치며 음흉한 미소로 응대했을 사내들의 능청스런 맞장구를 생각하니 그 또한 재미나는 혼자만의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잠시 엉뚱한 상상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이 오늘 나와 동행한 아이들이 제 멋대로 돌아다니고 흩어지고 했던 모양이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런 다음 아이들을 찾았고, 가까스로 그들을 챙겨 다음 코스로 옮겨갈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의 문화를 궁중문화, 학술문화, 예술문화 등으로 구분하여 각 주제에 맞게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그 시절, 그 오래 전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궁중의 복식과 장신구와 용기(用器)를 보았고, 조상들의 지혜와 사상과 철학이 담긴 서적과 기록물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것들 하나하나를 우리 역사에 대한 애틋한 감수성의 눈빛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감동하며 감상하였다.

 

 

3층 상설전시관 위 계단이 난 곳을 따라 올랐다. 첨단의 시대를 실감하게 하는 터치 뮤지엄 코너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서울의 역사, 문화, 생활에 대한 새로운 비주얼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정보화 시대의 아이들은 역시 익숙하고 능숙하게 그것들을 만지고 다루었다. 오래 전 역사의 흔적이 담긴 자료와 유물과 문화재를 첨단의 기술을 통해 만나고 접할 수 있는 현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융합, 즉 서울의 역사에 대한 퓨전의 체험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도시서울의 발달과정을 구성해 놓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선사시대 처음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던 시기부터 빌딩 숲으로 변모한 오늘날까지 서울의 모습을 상징적인 모형과 패널을 통해 소개하고 있었으며, 각 시기 대표적인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 쉬지 않고 박물관을 돌아다녔고, 우리들의 다리와 눈을 이용하여 부지런히 걷고, 볼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조선의 수도, 서울의 역사, 서울사람들의 생활, 서울의 문화, 도시서울의 발달에 대해 아쉽지만 벼락치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옛 도구를 직접 조작해보며 간단한 체험도 할 수 있었으며, 복제유물을 직접 만져보며 이해를 높이는 자유로운 박물관 탐방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박물관 3층 비교적 한적한 공간에 모여 각자 한 마디씩 소감을 주고받으며 오늘의 서울역사박물관 탐방을 실속 있게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박물관 뒤편에 있는 경희궁으로 향했다. 오늘의 박물관 탐방에 곁들여 순진하게도 가을날 궁궐의 산책을 덤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계단을 올라 숭정문을 지나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궐 마당으로 들어섰다.

 

엷고 붉은 빛이 감도는 깊어가는 가을날 오후의 햇살은 숭정전 마당 안에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숭정전 마당에 서서 무참히 훼손되고 부서져 황폐해졌던 조선 이궁의 마지못한 초라한 복원을 바라보았다.

 

 

경희궁은 최초에 그 명칭이 경덕궁이었다. 인조의 아버지 원종(추존왕)의 시호인 경덕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년) 경희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이라 했던 수난의 궁궐 경희궁에 대한 오늘의 느낌은 우울모드였다. 숭정전은 1618년(광해군 10년) 경에 건립된 경희궁의 정전이었으나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하면서 그 훼손과 수난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926년 일제는 어이없게도 숭정전 건물을 당시 일본인 사찰이었던 조계사에 팔았다.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 모를 사연을 안고서 현재는 동국대학교의 '정각원' 건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현 위치의 숭정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복원된 이미테이션일 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슬픈 희극에 다름 아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수난 또한 그에 못지않은 치욕의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일제는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흥화문을 떼어갔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박문사'는 지금의 장충동 00호텔 자리인데, 일제가 패망하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 소유한 별 다섯 개짜리 특급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흥화문은 마지못해 그 호텔의 정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 게다.

 

비록 오래 전 스러져 간 아픈 역사 속 조선궁궐의 정문이라지만, 대한민국 최고 자본권력가의 호텔 영업장에서 손님접대용 정문으로 조아려 서 있었던 과거는 슬픈 그늘이고 주름임에 틀림이 없다. 그랬던 것을 복원사업에 따라 199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세웠다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서 숭정전의 마당을 휘돌아 숭정전의 단아한 뒤태를 감상했다. 숭정전의 뒤를 돌아 계단을 오르니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임금님이 나랏일을 보던 전각이었지만 역시 일제에 의해 헐렸던 것을 <서궐도안>에 따라 근래 복원해놓은 것이란다.

 

자정전의 서쪽 계단을 내려서 짧은 회랑을 지나쳐 문턱을 넘어서니 영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시던 건물인 '태령전'이 있었다. 태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서궐도안>에 따라 지난 2000년에 간신히 복원되었다고 한다. 태령전의 기둥은 특이하게도 각주(角柱)로 세워져 있었고, 따라서 주춧돌도 네모진 형태였다. 단촐한 규모, 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창백한(?) 화장을 한 것 같은 단청, 그로인해 느껴지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가벼움과 옹색함이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궁궐에 들러 옛 정취와 가을 고궁의 고즈넉한 느낌을 얻어가려던 최초의 순진한 생각은 어설픈 무모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경희궁 관람료가 공짜라는 사실에 박물관을 거쳐 '꿩 먹고 알 먹으려' 낭만적인 감상으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다시 돌아서서 아이들과 함께 숭정문의 계단을 내려오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바닥에 밟히는 흙과 모래가 왠지 마르고 거칠다는 느낌이 예민하게 다가왔다. 수난과 상처의 역사를 품은 경희궁의 주말 오후는 황량한 바람과 빛이 있었고, 하늘엔 깊어가는 가을이 있었다.

 

 

어릴 적 아무것도 모른 채 어른들이 서울의 5대 공립 명문고 중 하나인 '서울고등학교' 자리라고 하여 그렇게만 알고 있던 이곳 경희궁지에 묻힌 쓰린 역사의 추억과 회한이 가슴을 여미게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일본 관료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던 총독부중학교(경성중학교)로 사용하기 위해 명색이 조선의 궁궐이었던 이곳을 허물고, 파괴하고, 팔아먹고, 갈아엎은 자들의 만행이 야만스럽다.

 

나는 오늘 박물관에 들러 아이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중요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서울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며 나름 우리 선조들의 시대와 삶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한편 그 뒤편 언저리에 수난으로 갈아엎어진 조선 궁궐의 폐허를 담담히 걸어보는 예감치 않은 불편한 나들이를 했던 것 같다. 다만 간신히 복원된 초라한 전각과 궁궐의 공간이 살아남아 끝내 버티고 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중 경희궁의 북서쪽 하늘을 멀리 바라보니 붉은 가을빛과 노을빛으로 저물어 가는 인왕산이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1월 8일, 15일 두 번에 걸쳐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을 다녀온 뒤 작성한 글 입니다. 


태그:#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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