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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거리에서 붉은 얼굴로 인사하는 나뭇잎들을 보면 어느새 마음 가득 채워지는 가을의 붉은 빛이 그리워진다. 애써 외면했던 붉은 단풍잎들의 손짓은 살 떨리게 그리워지는 발길을 산으로 향하게 한다. 나무들인 이미 그 붉은 가을을 땅에 내려놓았을지도 모르지만 산이 부르는 소리는 더욱 크게 메아리친다.

 

피아골 단풍 소식은 이미 10월 말에 다 퍼졌다. 피아골 단풍축제도 이미 11월 첫 주에 끝났다. 아마 피아골 단풍은 다 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가을을 붙잡고 있을 단풍에 대한 그리움은 메말라가는 대지처럼 내 마음을 조여들고 있다.

 

11월 9일(일) 새벽 6시 반, 배낭을 메고 광주 문화동 정류소로 나가 구례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7시 40분에 구례에 도착하여 8시 20분에 출발하는 성삼재행 군내버스를 탔다. 지리산에 오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성삼재까지 버스가 실어다 주는 버스가 있어서 노고단에는 아주 쉽게 오를 수 있다.

 

천은사 옆을 지날 때에는 문화재관람료라는 명칭으로 통행료를 받고 있어서 늘 실랑이가 심하다. 성삼재 오르는 도로와 천은사와의 거리는 상당히 멀다. 그런데도 성삼재 오르는 도로에 천은사 관람료 징수대가 있고, 징수원들이 군내버스에 올라와 문화재 관람료 1600원을 징수한다. 성삼재 오르는 길로 가는 버스에서 천은사 대문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노고단의 나무들은 이미 옷을 벗었다. 나무들은 겨울을 맞는 숙연함으로 서 있다. 눈이라도 한 줄기 흩날린다면 벌거벗은 나뭇잎들은 온몸으로 하얀 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또 지리산은 하얀 설국으로 탈바꿈 할 것이다. 오르는 길에 가득 쌓인 나뭇잎들이 지나간 가을을 알려 주고 있다.

 

10시, 노고단 정상에 올랐다. 세상은 온통 흐릿한 기운에 싸여 있다. 비가 내린 뒤 안개인지 매연인지 모를 흐릿한 기운에 멀리까지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노고단에서 바라본 지리산 줄기 아래에는 아직도 붉은 나뭇잎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도 단풍들이 그래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조급한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11시 반, 천왕봉 방향으로 가다가 임걸령 400m 전에 있는 피아골 삼거리에 도착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거쳐 피아골로 가는 길은 지리산에서 가장 쉬운 산행길이다. 오르는 길은 거의 없고, 피아골 삼거리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 약 2km 정도, 피아골 대피소에서 직전마을까지 단풍 계곡을 타고 약 4km 정도를 내려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피아골로 출발하였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이다. 이마 나뭇잎들은 모두 메말라 있거나 떨어져 있었다. 그냥 다 지나버린 가을을 밟으면서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가끔은 단풍나무들이 눈에 띄었지만 단풍잎들은 이미 말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피아골을 찾은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한 줄로 내려가는 행렬이 끝이 없었다. 좁은 길에서는 한 쪽으로 길을 비켜 기다리기까지 하였다. 늘 그렇듯이 피아골의 단풍은 11월 둘째 주에 절정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피아골을 찾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나 보다.

 

계단과 급경사로 이루어진 내리막길은 피아골 대피소에서 완만한 계곡 길로 바뀐다. 피아골 대피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대피소에서부터 직전마을까지 이르는 계곡에는 많은 단풍나무가 있고, 계곡에는 물이 흐른다. 하지만 가을 가뭄 탓인지 계곡물이 철철 넘쳐 흐르지 않는다. 

 

 

오후 2시, 피아골 대피소에서 구계폭포를 거쳐 삼홍소에 도착하였다. 아래로 내려가니 나뭇잎들이 그대로 붙어 있은 나무들이 많아졌고, 가끔은 붉은 단풍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산 아래에는 단풍들이 지나가는 마지막 가을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꼿꼿한 선비의 길을 걸었던 남명 조식 선생이 '산이 붉게 타니 산홍(山紅)이요, 단풍이 비친 맑은 소(沼)가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골짝에 들어선 사람들도 단풍에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노래했다는 삼홍소에는 맑은 물보다 물위에 떠 있는 단풍잎들이 더 많았다.

 

피아골은 지리산 반야봉 아래 삼도봉에서 황장산으로 뻗어나간 불무장등 능선과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왕시루봉 능선 사이 남쪽으로 펼쳐진 계곡이다. 피아골이란 이름도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심었던 골짜기, 즉 피밭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피밭골로 불리다가 이것이 변해 지금의 피아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독 사람들이 피아골 단풍을 전국 최고의 단풍 명소로 친다. 그만큼 단풍들이 붉다. 사람들은 곧잘 핏빛 단풍이라 부른다. 피아골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느낌일 것이다. 특히 6·25전쟁 당시 피아골은 빨치산과 군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 바람에 피아 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핏빛 단풍은 그들이 흘린 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삼홍소에서 표고막터를 거쳐 직전마을까지 이르는 계곡에는 많은 나무들에서 나뭇잎들은 낙엽이 되어 땅 아래 내려 앉아 있기도 하지만, 아직도 많은 단풍들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계곡에 흐르는 물이 많지 않지만, 그 위에 어우러진 붉은 단풍은 역시 피아골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혹시나 하고 찾았던 피아골의 가을은 아직도 그대로 핏빛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계곡에서 올려다 보이는 산줄기에도 아직 울긋불긋한 기운이 그대로다. 지리산의 정상 능선 부근은 이미 겨울의 시작이지만 아래 부근은 아직도 지나가는 가을을 붙잡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선연하게 붉은 단풍들이 아직도 그대로 피아골을 물들이고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피아골 단풍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어느새 붉은 단풍으로 가득 차 버렸다.

 


태그:#가을,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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