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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일행은 어둠 때문에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대와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뛰었다.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나 나뭇가지가 뺨을 할퀴어도 알지 못했다.

앞에 돌산이 나타났다. 병영에서 눈여겨보았던 돌산이었다. 야외 훈련 때 한 번 와 본 적도 있었다. 돌산에 오르면 평지가 나올 것이다. 그들은 해가 떠서 환해지기 전에 그 평지를 한없이 걸어 중국군의 관내로 들어가야 했다. 장준하는 돌산을 오르는 데 두 시간 정도를 예상했다. 그러나 공포에 질려 다급했던 젊은이들은 산을 한 시간에 기어올랐다. 시간이 단축된 만큼 체력도 소모되었다.

'부대에는 비상이 걸렸을까?' 장준하는 계산해 보았다. 병사 넷이 없어지자마자 바로 비상이 걸릴 리는 없었다. 취침 후 불침번에 의해 인원 파악을 하는 데 약 25분, 그리고 사람이 없어진 것이 확인되기까지 약 20분, 거기다 비상 발령까지 또 10분 정도를 더 감안한다면 최소 55분 정도의 거리를 벌려 놓을 수가 있었다.

산정에 오른 네 젊은이는 잠깐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오래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멀리 병영의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외등들이 희미한 윤곽으로 보였다. 그들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너 나 없이 동시에 일어난 그들은 다시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동그랗게 둘러서서 바람을 가리고 성냥불을 켜 나침반을 확인했다. 네 사람은 어렴풋이 드러나는 산등성이를 목표로 정한 후 다시 걸어 나갔다.

북극성을 길잡이로 삼아

느슨하게 계산해도 지금쯤이면 부대에 비상이 걸렸을 시간이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다시 조급해졌다. 그들의 발걸음이 재어질수록 헛디디거나 자빠지는 횟수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굴렀다가 또 걸었고 미끄러졌다가 다시 발을 내디뎠다.

이윽고 산등성이에 다다른 그들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들은 뜻하지 않은 사태에 직면했다. 그들의 앞길을 가로질러 난데없이 운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음을 느꼈다. 제발 다리라도 하나 있어 주었으면.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리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수심을 알아볼게."

수영에 익숙하다는 윤경빈이 상의를 벗었다. 물속에 들어간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보았다. 윤경빈을 주시하고 있던 세 사람의 입에서 작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 윤경빈은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수심을 물속에 서서 알려주고 있었다. 장준하는 윤경빈의 상의를 주워 들고 두 사람과 함께 물속으로 들어갔다. 키가 작은 장준하는 물살이 턱 위까지 차올랐다. 키가 큰 김영록이 줄곧 장준하를 돌보아주었다.

운하를 무사히 건넌 그들은 얼마 후 방향을 알아보려 하다가 다시 낙심하고 말았다. 주머니의 성냥이 다 물에 젖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방향을 모르고 걷다가는 허허벌판에서 어디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운이 나쁘면 제자리를 원으로 맴돌 수도 있는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부대 방향으로 되돌아 갈 수도 있었다. 장준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사이 구름이 끼었는지 밤하늘에는 별이 듬성듬성했다. 그는 구름 사이에 있는 북극성을 겨우 찾아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은 동북방이었다. 북극성으로 방향을 확신하게 된 그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도로와 인가를 피하며 조밭, 수수밭, 낙화생밭 들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고랑과 두덩을 짓밟으며 달렸다. 그러다가 가끔 한데 모여 숨을 골랐다. 이어서 다음 목표물을 확인하고는 다시 달렸다. 네 사람 모두 그들이 달린 시간과 거리를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의 수통에도 물이 들어있지 않았다. 인가를 피해 달리는 그들에게 우물이 나타날 리도 없었다.

붉은 광야와 검은 노을

날이 밝아지면서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야의 하늘은 한 모퉁이부터 밝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 양편이 한꺼번에 회색으로 물들더니 전체가 동시에 훤히 터지는 형상이었다. 안개 때문인지 아직 해는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어두운 밤보다 더 방향 감각을 방해했다. 갈증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초조와 공포가 다시 찾아들었다. 장준하는 육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육감대로 그들은 아직 일본군 관내를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네 사람은 일단 적당한 장소를 찾아 몸을 은신하기로 했다. 그들은 넓은 마름모꼴의 조밭 깊숙이 들어갔다. 밭의 한가운데까지 들어간 그들은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고 누웠다. 세 사람은 눕자마자 고단한 잠에 빠져들었다. 장준하는 조 포기를 뜯어 동지들의 몸을 가려주었다. 그랬다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엉금엉금 기어가서 제대로 가려졌는지를 확인해 보고 돌아왔다. 그도 조 포기로 몸을 가리고 잠을 청했다. 그는 엷은 흙냄새를 한 번 맡고 나서는 곧장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는지 몰랐다. 장준하는 햇살을 견디다 못해 눈을 떴다. 다시 갈증을 느꼈다. 뜨거운 지열이 등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목을 쓸어 보았다. 손에 땀이 축축이 느껴졌다. 그는 동지들을 건드려 보았다. 쉽사리 잠을 깰 성싶지 않아 보였다. 순간 그는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췄다. 뭔가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자동차 경적이 아니었을까? 그는 귀를 곤두 세웠다.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자동차의 엔진 소리 같은 것이 나고 있었다.

그는 물기가 배어 있는 성경책을 꺼냈다.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와들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성경을 무작정 열었다. 그는 손끝으로 성경을 짚은 채 눈에 보이는 대로 읽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도 듣지도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장준하는 수색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동료들을 깨워야 했다. 일군은 탈출병이 있을 때에는 부락민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수색을 벌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농민들은 들판을 온통 들쑤시고 다닐 것이었다. 그는 귓속말로 동지들을 깨워서 조 포기로 더 몸을 감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줄기 사이로 눈을 대고 서로 몸이 보이는지를 점검해 주었다.

자동차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네 사람은 미동도 없이 조 포기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중국인 청년 세 명이 장준하 앞으로 오고 있었다. 순간 장준하의 머리에는 적발될 경우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떠올랐다. 그들을 제압하여 기절시키든지 아니면 돈을 주고 매수하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가오던 중국 청년들은 발을 멈췄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보며, "메욜라, 메욜라"라고 소리쳤다. '여기에는 없다'는 뜻이었다. 네 사람은 눈도 깜박하지 않으며 땅에 붙어 있었다. 중국인 청년들은 돌아갔고,  삼십 분쯤 지나 네 사람은 자동차 경적 소리와 멀어져가는 엔진 소리를 들었다.

"이제 꼭 불침번을 서야겠네."

김영록이 장준하가 하고 싶던 말을 대신 해 주었다.

갈증보다 지독한 향수를 느끼며

대륙의 햇볕은 뜨거웠고 젊은이들의 갈증은 참혹했다. 한낮 더위가 40도 가까이 치솟고 있었다. 바람은 한줄기도 없었고 복사열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해 보았다. 수수밭에서 수숫대를 가져다 씹었는데 물은 없고 이와 혀만 아팠다. 그들은 김영록의 주머니에 있던 쌀을 꺼내 입안에서 오물거려 보았지만 오히려 갈증을 더 키우는 것 같아 뱉어내고 말았다.

그들이 생각해낸 방법 가운데 그나마 유효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옷을 홀랑 벗고 그늘이 있는 축축한 흙을 찾아가 알몸으로 지렁이처럼 비볐다. 시간이 흐르며 햇볕과 지열이 식어갔다.

해가 떨어지자 날씨는 급속도로 선선해졌다. 그들은 수숫대가 사각대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네 사람은 모두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정표 없는 여정에서 서글픈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동북방으로 걷는 그들의 뒤로는 노을이 검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초원이 나타났다. 네 젊은이는 손에 손을 잡고 걸음을 맞춰 걸어 나갔다.

갈증과 허기로 정신이 혼미해진 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향도 가족도 그리고 조국도 그들에게는 당면 문제가 아니었다. 싸늘한 바람이 젊은이들의 머리칼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은 밤을 새워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날이 밝으면 밭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 할 터였다. 젊은이들은 잡은 손의 감촉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다.

문득 장준하는 손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더니 자기를 잡은 손이 맥없이 풀리며 옆에서 걷던 홍석훈이 피익 쓰러졌다.

"홍 동지!"

홍석훈은 정신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쓰러진 동지의 주위에 털썩 주저앉은 세 사람은 갑자기 북받친 설움을 눈물과 흐느낌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일군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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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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