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연군묘가 예산의 가야산 자락에 자리 잡게 된 연유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이다. 남연군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 땅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하응은 지관 정만인을 만나 명당자리를 소개 받고 이장을 결심하게 된다. 그 명당자리가 가야산 자락에 있는 이대천자(二代天子)의 땅과 오서산 자락에 있는 만대영화(萬代榮華)의 땅이다. 그 중 이하응은 이대천자의 땅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땅에 가야사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하응이 이곳에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려면 가야사를 다른 곳으로 옮기든지 아니면 절을 없애야만 했다. 이하응은 이 절에 불을 질러 폐사시키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가야사 스님을 돈으로 매수해 불을 지르도록 했다는 설도 있고, 충청감사를 통해 폐사시키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가야사는 없어졌고 1846년 그 자리에 남연군의 묘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1852년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태어났고, 그는 1863년 조선 제26대 왕이 되었다. 고종은 조선 말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나름대로 정치적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1897년 고종은 국권선양과 자주수호라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흥선대원군의 집안에 천자가 탄생했고 고종의 아들 순종이 1907년 2대 황제에 오르니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가 탄생한 셈이다.

 

남연군을 연천 남송정(南松亭)에서 예산 덕산(德山)으로 이전하는데 사용된 상여가 현재 묘 아래 보호각에 모셔져 있는 남은들 상여이다. 남은들은 덕산면 광천리의 마을 이름이다. 이곳 사람들이 남연군의 상여를 마지막으로 운구하게 되었고 그 보답으로 상여를 받게 되어 남은들 상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상여는 2006년 3월17일까지 덕산면 광천리 519-6의 곳집에 모셔져 있다가 서울의 국립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남연군묘 아래 보호각에 있는 상여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인 전흥수씨가 남은들 상여를 모방해 만든 복제품이다.

 

  

그런데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가 가야산의 북쪽에 있다면 광천리는 가야산의 남쪽에 있다. 그렇다면 남연군의 상여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경기도 연천은 충청도 덕산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를 통해 우리는 운구가 배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연천의 고랑포에서 배에 실린 다음 임진강을 따라 서해로 나와 서산의 해미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해미에서부터는 육로로 광천리, 대치리, 사동리를 거쳐 상가리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신도비를 통해 본 남연군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가장 먼저 남연군 신도비가 눈에 띈다. '숭정기원후4을축5월 일립'이라는 기록을 통해 1865년 5월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전체 4면비로 비의 상단 전면과 후면에 전서로 '남연군충정공신도비명'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글씨는 남연군의 맏손자인 이조참판 이재원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전면 오른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시충정공 신도비명 병서'라고 쓰고, '성상이 즉위한 원년인 갑자년에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해서'로 시작하는 비문이 이어진다.

 

이 비문은 좌의정 김병학이 찬하고 남연군의 셋째 이들인 흥인군 이최응이 글씨를 썼다. 내용을 보면 김병학은 먼저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고쳐 내리게 된 연유를 쓰고 있다. 충은 염방공정(廉方公正)을 의미하고 정은 이정복지(以正服之)를 의미한다. 여기서 염방공정은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정하고 바르다'는 뜻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등상에 '품행이 방정하다'는 말을 썼는데 이 방정이 염방공정의 준말이다. 이정복지란 '바른 것으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문에는 남연군의 가계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인조대왕까지 그 혈통이이어지는데 그 처음을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에게서 찾고 있다. 그리고 1788년 8월22일 태어나 은신군의 양자가 되었고 1836년 3월19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있다. 묘는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다가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1845년 다시 덕산 가야산 북록(北麓: 북쪽 기슭)으로 옮겼다가 1846년 3월18일 중록(中麓) 건좌(乾坐)에 안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슬하에는 자식이 4남1녀가 있는데 장남이 흥녕군 창응이고, 차남이 흥완군 정응이며, 삼남이 흥인군 최응이고, 사남이 흥선대원군 하응이다. 그리고 손자들이 있는데 맏이가 비문의 글씨를 쓴 재원이다. 흥선대원군의 맏아들은 재면이며 둘째 아들이 나중에 고종이 된 재황이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명(銘)을 지었는데 마지막 문장이 '큰 기틀을 영원히 보살펴서 억만년 이어지소서(永佑鴻基時萬時億)'이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이 망했으니 그 바람은 겨우 45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명당터에도 약점은 있게 마련이니

 

 

신도비를 지나 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평탄한 잔디밭에 남연군 묘표가 나타난다. 이곳에 보면 시호가 영희공(榮僖公)으로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연군의 처음 시호가 영희공이었으며 나중에 충정공으로 바뀐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언덕으로 나 있는 가파른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남연군묘에 도달할 수 있다. 이곳에 오르니 사방으로의 전망이 탁 트인다. 그리고 남연군묘 뒤로 가야산 줄기가 좌우를 웅혼하게 감싸고 있다.

 

 

정말 명당임에 틀림이 없다. 아래로는 시원한 느낌이, 위로는 경건한 느낌이 몸을 통해 흘러간다. 묘역 또한 단정하게 벌초가 되어 있다. 묘를 답사할 경우 풀이 무성하면 이상하게 산만한 느낌이 드는데 깨끗해서 좋다. 먼저 풍수전문가 조준형 고문이 이곳에 남연군묘가 자리 잡게 된 연유,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수난을 당하게 된 경위 등을 설명한다. 그리고 풍수상의 좌향과 명당의 조건 등에 대해 두루 설명한다.

 

남연군묘의 주산은 석문봉(653m)이고 안산은 봉수산이다. 좌우에 혈을 지켜주는 신장(神將)이 있는데, 그것이 오른쪽의 천을(天乙) 가야봉(667.6m)과 왼쪽의 태을(太乙) 옥양봉(621.4m)이다. 이들 세 개의 봉우리가 봉황의 머리와 날개를 형성해 크게 비상하는 형국이다. 남연군묘의 좌향은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해좌로 들어가서 사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좌는 혈의 뒤쪽 방위를 말하고 향은 혈의 앞쪽 방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물길은 우백호에서 득수(得水)하여 혈을 감싼 다음 좌청룡으로 파구(破口)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명당이다.

 

 

그러나 이런 명당에도 약점은 있다. 주산 왼쪽으로 길게 뻗은 좌청룡의 중심산이 서원산(473.2m)이다. 이에 비해 주산 오른쪽으로 짧게 이어진 우백호의 중심산은 원효봉(604.7m)이다. 문제는 이처럼 뛰어난 백호가 낮은 청룡을 압도해 청룡이 백호에 쫓겨 물을 따라 도망치는 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양상을 일반적으로 혈광지환(血光之患)이라고 하는데 그로 인해 결국 용이 죽고 만다.

 

이런 자리는 비장의 마지막 카드를 내밀 때 쓸 수 있는 곳으로 모두를 얻거나 모두를 잃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은 남연군묘에 큰 도박을 건 것으로 잠시 크게 얻을 수 있었으나 결국 모두를 잃고 만 셈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 "가야산 동쪽 가야사 지역을 옛날 상왕(象王: 모든 부처)의 궁궐터"라고 했을 정도.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 세속적인 욕심을 개입시켰으니 결국 2대천자로 끝나고 말았다. 풍수지리상 명당에 대한 얘기는 이처럼 늘 슬프게 끝나는 경향이 많다.  

 

석물에 조각된 아름다운 문양들

 

 

남연군묘의 풍수지리적인 설명을 듣고 이제는 묘 앞의 석물을 자세히 살펴본다. 남연군묘는 봉분 왼쪽에 비석이 있고, 그 앞쪽으로 혼유석, 장명등, 양석, 망주석이 있는 형태이다. 봉분은 둘레석이 있는 단아한 모습이다. 봉분 왼쪽 비석에는 충정공 완산이씨 이구와 그의 부인 여흥민씨의 묘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뒤에 세운 날짜를 보니 1865년 3월이다. 그리고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썼다.

 

 

혼유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상석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아래 있는 4개 받침돌의 조각이 아주 정교하다. 돋을 새김된 모양을 보니 도깨비 문양(鬼面)이다. 혼유석 바로 앞에는 장명등이 서 있는데 지붕, 화창, 몸체, 받침대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은 팔작 기와 형태로 만들어졌다.

 

특히 화창 아래 몸체의 장식이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다. 몸체는 크게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단에는 함박꽃으로 보이는 큰 꽃을 4면에 새겨 넣었다. 중단에는 직사각형에 당초문 또는 겹친 마름모꼴 문양을 새겨 넣었다. 하단에 장식된 화초문양이 가장 아름다운데 네면 중 두면에 난초와 국화를 새겼다. 그리고 나머지 두면에도 화초를 새겼는데 화초의 종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혼유석의 양쪽에는 양석이 각각 한 마리씩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양석의 얼굴과 뿔 그리고 발굽 등이 아주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고 배의 옆부분에는 난초를 조각해 넣었다. 양석 바깥으로는 망주석이 각각 한 기씩 서 있는데 상중하 세 부분의 조각이 아주 정교하다. 상단부는 피기 직전의 연꽃처럼 날렵한 모습이고 중단부는 팔각기둥으로 세호가 새겨져 있다. 하단부는 다시 3단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에 꽃, 안상, 식물무늬를 돋을 새김했다.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상당히 우수해 보인다.

 

 

지금까지 왕릉을 여러 군데 보았지만 이처럼 조각이 정교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아마 흥선대원군이 당대 최고의 석수를 동원했던 모양이다. 자고로 무덤은 자식을 잘 둬야 명당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또 봉분이나 석물이 크고 정교할 수 있다.

 

남연군도 아들과 손자의 세도 덕에 이처럼 훌륭한 자리를 차지하고 호사를 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같은 문화 답사객이 꾸준히 찾아오니 또 외롭지도 않을 테고. 그런 의미에서 남연군은 복받은 사람이다.    

 

남연군묘와 관련된 연표

1788.8.22.  인평대군의 6세손 이병원의 둘째 아들로 남연군이 태어남

1820.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흥선군 이하응이 태어남

1836.3.19.  49세의 나이로 남연군이 세상을 떠남.

               묘는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있다가 연천 남송정으로 이장.

1845.        흥선군이 남연군묘를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으로 일시 이장.

1846.3.18.  남연군묘를 가야산 가운데 기슭 건좌(乾坐)로 이장.

1852.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이 태어남. 재황이 1863년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이 됨.

1863.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재황이 왕으로 등극하고 흥선군은 대원군이 됨.

1868.4.21.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남연군묘 일부가 훼손됨.

1897.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에 오름

1898.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상을 떠남

1907.        순종이 대한제국 2대 황제에 오름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충남 서산과 예산의 경계를 이루는 가야산 지역 문화유산을 답사하고 쓴 마지막 글이다. 


태그:#남연군묘, #남연군 신도비, #석문봉, #2대 천자지지, #석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