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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자금성의 사자상. 지구와 우주를 상징하는 공을 발톱아래 두고 있다.
▲ 자금성. 북경 자금성의 사자상. 지구와 우주를 상징하는 공을 발톱아래 두고 있다.
ⓒ 김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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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천도를 완료한 섭정왕 도르곤이 소현을 황궁으로 초치했다. 소현은 빈객 김육, 문학 이래, 보덕 서상리를 대동하고 입궁했다. 자리에는 용골대와 손이박시가 배석했다.

"북경을 얻기 전에는 두 나라가 서로 의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지금은 대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서로 성의와 신의를 가지고 믿어야 할 것이다. 세자는 동국의 왕세자로서 여기에 오래도록 머물 수 없으니 지금 본국으로 영원히 보낼 것이다. 봉림대군은 우선 머물러 있다 인평대군과 서로 교대해서 왕래하도록 하라."

소현은 귀를 의심했다. 영구 귀국이란다. 얼마나 기다렸던 말이냐? 어두웠던 조국의 하늘이 열리고 막혀 있던 고국의 땅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압록강을 건너면 마음대로 조국산천을 거닐 수 있다. 이 얼마나 목말랐던 자유인가. 새장에 갇혀 있던 한 마리 새에게 빗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슴 아파 했는데 이렇게 좋은 일도 있구나. 소현은 뛸듯이 기뻤다.

북경을 손에 넣을 때까지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두려는 전략

이로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고 세자를 볼모로 한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청나라의 최종 목표는 북경이다. 중원을 손에 넣기 위하여 조선을 침공하고 세자를 인질로 삼은 것이었다. 청나라가 대륙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는 조선과 명나라의 연결고리를 끊고 조선을 한반도에 묶어두는 것이 필수였던 것이다. 흥분한 세자관은 본국에 장계를 띄웠다.

"황제께서 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세자관은 귀국 준비에 착수했다. 허나 난감한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북경에서 한성까지 3천3백리. 짐을 싣고 갈 소와 말이 문제였다. 1차 목표를 심양으로 정했다. 지난번 심양에서 북경으로 이주할 때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징발한 마부와 말이 이제 겨우 본국에 돌아갔으니 그들을 다시 징발할 수도 없다.

현지에서 소·말·당나귀·노새를 임대하려 해도 심양까지 한 필에 35냥이다. 백 필의 삯은 3천5백 냥에 달한다. 난감했다. 심양에 도착하여 지불하기로 하고 소와 말을 확보했다. 관원들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사이 소현은 아담 샬에게 고별 편지를 썼다.

"보내주신 천주님의 성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서양 문서를 선물로 받자옵고 제가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귀하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중 몇 권의 책을 읽어보니 정신수양과 덕성 함양에 적합한 도리가 갖추어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나라는 학문에 대한 광명이 결핍되어 오늘날까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천주님 성화와 그 존엄한 모습은 앙모하는 자에게 심오한 인상과 감회를 자아내는데 이를 벽에 걸어 모시고 우러러 뵈오니 보는 이의 마음이 평온해질 뿐 아니라 실로 속세의 때와 먼지를 청정케 합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조선인이 서양의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우리를 이끌어준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서적과 천주상을 고국에 가져갈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마는 우리나라는 아직 천주 숭배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그 존엄성을 모독할까 염려되어 걱정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이런 까닭에 귀하가 동의하신다면 이 천주상 만은 돌려드리는 것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조선에 천주학은 부담스러웠다

아담 샬이 선물로 준 천주상을 정중히 돌려줬다. 조선은 유교를 신봉하는 국가다. 성리학은 종교 이상의 국가 이념이다. 이러한 조선에 천주학을 들고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적지 않았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 천주학의 파장을 염려한 것이다.

세자 일행이 북경을 출발했다. 동직문과 좌안문을 빠져 나와 일로 동쪽으로 향했다. 진짜 고국으로 가는 길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산해관을 통과 한 세자 일행은 잰 걸음을 놓았다. 정월 초아흐레. 드디어 심양에 도착했다. 볼모의 땅 심양이건만 소현에게는 제2의 고향 같은 느낌이었다.

정조사(正朝使) 정태제가 북경에 들어가 하례했다. 신년인사다. 용골대가 도르곤의 뜻을 전했다.

"이미 중원을 차지하여 천하가 통일될 형세이니 이제부터는 의심할 일이 없다. 봉림대군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한다."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세자도 대군도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대군일행도 귀국준비에 착수했다. 한편, 심양에서 귀국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보덕 서상리가 세자에게 보고했다.

"황제께서 세자궁의 관원과 질자로 머물고 있는 대신의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채단(綵段) 2백 필을 보내왔습니다. 또한 한인(漢人)과 몽고사람 남녀 20여 명, 채원부(菜園夫) 2명, 환관 3명을 데리고 가라 하셨습니다."
"물품은 괞찮다만 사람은 부담스럽지 않느냐?"

"예부관원 유진장이 말하기를 '황제가 하사하였으니 떨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한두 사람만 데리고 가서 책임을 메우도록 하라."

4천7백여 석의 곡식을 어떻게 할까요?

"관소에 곡식이 4천7백여 석이나 남아 있습니다. 이를 어찌할까요?"
"농사는 빈궁이 지었으니 빈궁에게 여쭈어 보아라."

보덕 서상리가 빈궁전을 찾았다.

"빈궁마마! 곡간에 쌓아둔 곡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쌀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근본이다. 곡간에 쌓여있는 곡식은 이곳에서 생산된 식량이므로 이곳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이다. 식량을 가지고 가는 것은 가당치 않으나 세자 저하의 재가를 얻도록 하라."

"소와 말은 어떻게 할까요?"
"소와 말은 우리가 농사짓기 위하여 사들인 축생이다. 가축은 팔아서 돈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가하나 이 또한 저하의 재가를 받도록 하라."

서상리가 또 다시 세자의 집무실을 찾았다.

"빈궁마마께서 세자저하의 재가를 받아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식량은 호부에 이관하는 것이 좋을 듯 하나 이도 국가의 재산이다. 본국에 품의하여 조정의 지시를 따르도록 하고 가축은 처분하여 노자로 쓰도록 하라."

세자관으로 알려진 심양아동도서관. 최근 다른 곳이라는 설이 있다.
▲ 세자관. 세자관으로 알려진 심양아동도서관. 최근 다른 곳이라는 설이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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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이 세자관을 출발했다. 귀국길이다. 세자관 식솔 2백여 명과 공속된 남녀 포로 110여 명, 인삼을 캐다 잡혀간 자 50여 명, 그리고 둔전에서 농사짓던 농군이 뒤따랐다. 500여 명에 이르는 대형 행렬이었다.

심양을 떠난다 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잃은 것이 많았지만 얻은 것도 없지는 않았다. 정축년(1637년)부터 을유년(1645년)까지 만 8년.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인생의 가장 왕성한 활동 시기를 볼모로 보냈던 것이 잃은 것이었고, 힘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이 수확이었다.

힘없는 조국, 더 힘없어 대륙에서 사라져 버린 아버지의 나라 명나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융기하는 청나라. 힘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게 했던 심양이었고 힘의 현실감을 피부 가까이 체득할 수 있었던 심양이었다.

세자관이 점점 멀어졌다. 가슴에 사무치는 한과 서러움이 올올이 맺혀 있는 세자관이지만 점점 멀어지는 관소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소현이 뒤돌아보았다. 말없이 서 있던 회화나무가 석별을 고하듯이 가지를 구부리고 있었다. 강빈 역시 맏아들 석철을 고국에 두고 홀몸으로와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니 감회가 새로웠다.


태그:#북경, #청나라, #명나라, #심양, #소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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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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