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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산골짝 가을 한낮은 고적하고 쓸쓸합니다. 하늘이 높아가고 따사로운 햇살이 가을 들판을 내리 쪼이면 고독 같은 덩어리가 뭉클뭉클 가슴 속으로 밀려와 먼 곳을 자꾸만 내려다봅니다. 행여 누가 오시려나 구불구불한 동구 밖 들머리 쪽을 둘러봐도 개 짖는 소리만 골골을 지나 적막을 짓이겨 놓습니다.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산, 산, 산입니다. 이따금 스쳐가는 가을바람에 산국, 쑥부쟁이, 구절초들이 알몸을 흔들어 꽃 향을 토해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바람에 급기야는 그만 울음이 터질 것만 같고, 넓은 바다를 향해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어집니다.

 이맘때면 진보라색으로 피어나는 해국, 몇 년 전에 울릉도에 갔을 때 어느 예림원에서 사다 옮겨왔으나 산골짝에서도 잘 적응하고 있다.
 이맘때면 진보라색으로 피어나는 해국, 몇 년 전에 울릉도에 갔을 때 어느 예림원에서 사다 옮겨왔으나 산골짝에서도 잘 적응하고 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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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까, 길을 떠날까 하다 마음을 추스르고 밭고랑을 꾹꾹 밟아댑니다. '이 바쁜 가을철에 가긴 어딜 가' 그렇다. 첫 서리 내린다는 상강(10월 23일)이 오기 전에 서둘러 작은 목숨들을 부지런히 거둬들여야 합니다.

고춧잎과 깻잎을 따 똘똘 말아 간장 된장에 담고, 호박은 잘게 썰어 말려야 겨울양식이 됩니다. 팥도 뽑아 말리고 산 까치가 해치우기 전에 다래와 돌배, 오미자, 구기자도 갈무릴 해야 올 겨울이 넉넉합니다.

들깻잎을 따는데 아까부터 어디선가 잔잔한 파도가 부서지고 포말이 밀려오는 소리가 환청 되어 귀를 간질이고 있습니다. '아저씨, 고독하시지요. 내 곁으로 가까이와 봐요' 밭둑 돌너덜에서 해국(海菊) 피어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산사나이의 가을 마음을 어찌 알고 산골짝까지 바닷바람을 쏜살같이 몰고 달려왔는지….

 해국과 소라, 소라와 조갯껍질은  남도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을 해국옆에 놓아두고 바다가 그리우면 고동소리를 환청으로 듣곤한다.
 해국과 소라, 소라와 조갯껍질은 남도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을 해국옆에 놓아두고 바다가 그리우면 고동소리를 환청으로 듣곤한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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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럽고 풋풋했던 총각 선생 시절, 동해안 조그만 바닷가 고등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문학시간에 바다에 연관된 시나 이야기가 나오면 그만 몸살을 앓고 신열이 가라앉지 않아 바닷가를 홀로 거닐며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을 그린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도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 조병화 <소라>의 전문

그럼요, 소라의 꿈과 외로움은 그대로의 몸부림, 바다가 그립고 파도소리가 듣고 싶어 먼 동해 바닷가를 찾아왔건만, 섬마을 선생은 서울이 그리워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곤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 아이들이 밀물처럼 운동장을 빠져나가 썰렁하면 설움 같은 것이 북받쳐 바닷가를 헤매며 부서지는 포말과 짭조름한 해풍을 마시며 소라와 조개껍질로 모래성을 쌓다 허물곤 했습니다.

 왕해국, 키가 크고 왕성하며 솜털이 보송하다. 만지면 터질듯.
 왕해국, 키가 크고 왕성하며 솜털이 보송하다. 만지면 터질듯.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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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모래밭 지평선 너머로 한 여학생이 무언가 머리에 이고 가물가물 다가섭니다. 봉사부장 ‘해옥’이가 광주리를 이고 나타난 것입니다. 하도 기가 막혀,

“이게 뭐냐.”
“저녁 잡수시라 울 엄마가 선생님 갖다 드리라 했어라.”

생전 처음 대하는 곰치국과 통미역 줄거리, 깡 보리밥에 막 된장…. 광주리를 내려놓자마자 많이 드시라 해놓곤 바닷가를 겅중겅중 뛰어다녔습니다.

마지막 미역 줄거리를 씹으며 부서지는 포말을 향해 끼룩끼룩하고 있는데, 이번엔 “선생님, 이거” 하며 진 보라색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주었습니다.

당시엔 꽃의 관해 별관심이 없었기에 그 꽃 이름을 몰랐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야 ‘해국’이란 걸 알았습니다. 마침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에 해옥이의 단발머리가 나풀거리고 가무잡잡한 얼굴이 해국을 닮아 뽀얗게 물들어왔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가을만 되면 동해안 섬마을 백사장에 밀려오던 파도소리와 가파른 벼랑 너덜겅에 주걱모양을 하고 촘촘히 피었던 해국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울릉국화, 울릉도가 고향이며 가을이면 벼랑 너덜겅에 피어 바다의교향곡을 연출하고 있다
 울릉국화, 울릉도가 고향이며 가을이면 벼랑 너덜겅에 피어 바다의교향곡을 연출하고 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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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국의 꽃말은 ‘기다림’입니다. 해국은 거센 해풍과 짭조름한 바다냄새와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가을을 기다려 한 송이 해국으로 강하게 피어납니다. 해옥이가 졸업할 때까지만 섬마을에 남아 소라의 고동소리를 함께 들으며 또 다른 해국이 되알진 생명력으로 피어나게 해 달라했건만, 삼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철새처럼 훌쩍 대관령을 넘어 영서지방으로 날아오고만 철없던 시절의 선생은, 선생도 아니었습니다.

졸업하면 뭍으로 나아가는 게 소원이라던 해옥이는 지금도 섬마을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소라는 꿈을 꾸고 해국은 그 벼랑너덜에 피어있을까. 가을걷이가 마무리 되는대로 짭조름한 바다냄새와 뽀얀 털이 촘촘한 해국을 만나러 동해안 섬마을을 한 번 다녀와야 할까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의 <산촌일기>에도 함께합니다.



#해국#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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